장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1917~1973)
1. 멜빌과 브레송
멜빌과 브레송이 닮은 구석이 많다고 한다. 난 멜빌보다. 브레송의 영화를 많이 봤다. 때문에 멜빌이 말하고자 하는 정서를 정확하게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붉은원이라는 작품을 놓고 봤을 땐 브레송의 그림자가 아른거리긴 한다. 난 그가 만약 브레송의 영향아래 있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영화로 소화 시키거나 혹은 그를 따라한다거나 했다면 그것은 큰 오만이거나 실수일 것이라 생각한다. 시네마테크에가서 무작정 영화를 많이 보면 모든 것들이 해결될 것인 냥 영화를 보러 갈 때에 그 오만함에 빠져 있을 때 브레송의 영화를 따라한답시고 그가 말하는 시네마토그레프야 말로 진정한 미래의 영화라 부르짖으며 친구와 함께 그에게 영화를 바치겠다며 기획하려 했던 적이 있다. 실현시키진 못했지만 연기 경험이 없고 손이 이쁜 친구들을 불러 배우를 시키고 시나리오를 구성하고 흑백필름을 구입하고 단하나의 렌즈로 그의 영화들의 장면들을 캡춰 하다시피 하여 콘티를 짜고 모든 소리를 새로 만들어내고 그렇게 준비를 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어디까지나 애들 장난일 뿐이었을 것이다. 이전 글에도 많이 반복해서 언급했지만 누군가를 따라 한다는 것은 예술가로서 가져야할 입장이 아니다. 누구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는 있지만 따라 한다는 건 연습이나 습작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한다.
난 오마주는 존경이아니라 잘난 척 이라고 생각한다. 심하게 말해 예술가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 영화 자체로서 완벽해야 한다. 그랬다. 난 실패했다. 그것을 인정했고 브레송에 대한 존경은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브레송의 영화는 브레송이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히 영화가 아니라 그가 늘 말하는 모방 불가능한 시네마토그레프인 것이다. 그의 영화는 적어도 내가 봐온 바론 가장 원초적인 영화의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한 연극적인 것을 거부한 영화 이미지 자체로의 영화 난 그것을 태초의 영화라고 단언하고 싶다. 브레송은 영화가 예술이 되려면 다른 예술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가려낼 것인가 고민하는 방식이다. 들뢰즈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것의 이미지로 꽉 채워진 캔버스에 필요 없는 이미지들을 빼내어 결국 남는 무엇이 의미가 되는 작업인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우리들이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완전 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브레송은 연극적인 것을 배제하려고 모델의 이름으로 무명 배우를 쓰고 회화를 거부하며 미장센을 없앴다. 때문에 이것은 전적으로 오로지 영화적인 것이며 브레송은 그의 표현 방법과 같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테마를 형식과 동일한 지점에 가져다 놓는다. 거기서 숭고함이 나오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표현방법을 찾았으며 뜻하지 않게 그것이 영화 태초의 모습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멜빌도 그것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브레송이 침묵을 선택하면서 화면 밖의 소리에 집중했을 때 그는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조용한 침묵을 통한 고독만을 남겨두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말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체 클로즈업을 통한 이미지의 파편화 과정 즉 누구나 흔희 말하는 굉장히 즉물적인 숏들 또한 비연기자의 기용, 죽음에 관한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의미심장한 제스처 등을 그도 알 것이지만 그것들을 자신의 영화에 사용한다는 것은 혹은 브레송이 남긴 흔적들을 자신의 영화에 남긴다고 하는 것은 정말 얼토당토 않는 일이다. 실패고 낭패이다. 사실상 말이 없는 경찰관들 말이 없는 범죄자들이 상상이나 되는 것일까? 브레송이 보여주는 말없는 사형수, 소녀, 당나귀, 신부, 투사 등등은 그의 명백한 이유가 있고 각자의 운명적인 순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손에 집중을 했으며 손이 몸의 일부가 아니라 몸이 손의 일부가 되게끔 하는 마법을 부렸으며 인간을 철저히 모델화 시키려다 어느 순간 영화의 주인공을 당나귀로 캐스팅해 버리기 까지 한다. ‘극단‘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단순히 영화적인 숭고함을 위한 것으로 그리고 인물을 죽음의 문턱으로 몰면서 그것도 노골적인 경찰들의 총격 속에 죽음을 맞이하면서 숭고함을 기리는 것은 어떤 의미도 없다, 악한 것은 죽는 것이다. 하지만 브레송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다른 의미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의미했다. 하지만 멜빌의 죽음은 장르안의 죽음이 되어 버린다. 때문에 촌스럽기 그지없다. 난 잘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그가 브레송의 영향아래 놓여있을 때의 말이다.
2. 암흑가의 세사람
코리와 보젤이 보석상을 털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전체적인 과정은 물론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다. 그런 브레송도 마지막 동아줄을 타고 내려 올 때에 그 전시간의 응집을 땅으로 풀어 놓을 때에 잠시나마 사운드를 통한 긴장의 순간이 있다. 모델이 멈추는 정적의 순간,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찰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멜빌을 보자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다리를 타고 넘어가고 유리를 갈라 들어가서 경비를 때려눕히고 화려한 보석상에서 아무런 제제도 없이 공간에 대한 긴장도 없이 혹은 긴장에 대한 서브플롯도 존재하지 않고 마구잡이고 털기 시작한다. 어떤 정점의 순간이 없다. 브레송과 같이 그 영겁의 순간을 잡거나 하는 고민이 없다. 난 오히려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브레송의 냄새가 나지 않는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브레송과 결부를 시키려는 노력은 멜빌의 영화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뿐이기 때문이다. 일말의 희망을 제시해주는 그러니까 예술적인 어떤 감흥을 다 버리고 이것을 장르에 두고선 남자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간단해 지는 것이다. 멜빌의 영화는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보면 멜빌 자신에게는 비참해 지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아직까지 난 그의 영화를 브레송 만큼이나 보지 못했기에 더 이상 말한다는 건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바바리코트와 중절모 그리고 총과 경찰 범죄자들 모든 소재는 어떤 철학적인 의미를 말하려고 만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암흑가의 세 사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영화는 시작부터 불교 경전에 나온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하는데 그럼 이것으로 이 영화의 의미를 단순한 재미 이상의 어떤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난 마테이 경감이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둥 ‘인간은 모두 유죄’라는 둥 철학적인 말을 직접적으로 내뱉는 노골적인 표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부담스럽기 까지 하다. 그리고 붉은 원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 왜 한글제목이 암흑가의 세 사람으로 바꾸었는지 모르겠다.) 장르의 소재를 들고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멜빌의 표현은 정적이고 가끔 괴팍하다. 숨소리마저 나지 않는다. 숏의 구성이 엉성하고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사이즈 등등이 감정의 흐름을 막는다. 하지만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칭찬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영화를 계속 보면 앞서의 부정들 보다는 당시 미국필름느와르 영화들이 가진 화려한 이미지들을 멋지게 활용하는데 더욱 큰 신경을 쓴 듯이 보인다. 특히 그런 이미지들을 통해서 얀세와 같은 인물들의 고독한 내면을 다루는 것은 매우 탁월했다. 이를테면 범죄자들과 경찰관을 상당히 대등하게 관찰 할 수 있게 표현 하였다. 관습에 따라 역시 엔딩은 경찰관들의 말들. 현장을 수놓는 순경들 경찰차, 구급차 등인데 멜빌도 그대로 영화를 마지막 까지 이끌어 가지만 그 과정만큼은 조금 남달랐다. 특히 마테이경감이 집에 들어왔을 때 꾀나 나이든 경감이 집에 들어오지만 반기는 가족도 없고 고양이 세 마리만 있으며 낮임에도 불구하고 불을 켜야만 들어갈 수 있는 집안 공간은 필연적으로 어둠을 밝혀야만 하는 경찰의 임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그가 쌍띠의 아들을 이용하는 것과 같이 가족을 이용해 범인들을 잡아나간다는 것이다. 정직해야할 경찰이 일종의 사기를 쳐서 범인을 잡으려고 하는 행위의 재미가 분명 있다. 경찰들 나름대로의 고민들, 악은 끝내 잡히지만 선의 상징인 경찰조차도 선이 곧 행복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지점 그것이 헐리웃 장르와의 다른 지점인 것 같다. 그러니까 멜빌은 영화에서 인간을 말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누구나 각자의 운명과 사정이라는 것이 있고 그것은 어쩌다가 우연으로 결합이 되며 결국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다 힘을 얻고 일을 성취하며 또 운명처럼 죽음으로 가게 되는 어쩌면 그러한 과정의 끝에 이승에서의 만남이라는 게 붉은 원안에서 만나는 지점이 아니라 저승의 그 어떤 공간에서의 만남으로써 붉은 원안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갈 운명이었던 것이다. 붉은 원이 지옥의 담벼락 일 수도 있는 것이다.
멜빌의 운명론은 다소 암울하기 그지없다. 아무리 다시 만난다 하더라고 그 충돌과도 같은 만남이 붉은원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일생에 대한 회의로 가득한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희망의 순간은 얀세의 이승에서의 성취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값비싼 보석이 있어도 그들은 행복해 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경감역시 그들을 다 죽이고도 행복해 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우리 역시도 과연 삶을 살아갈 때에 목적을 성취한다고 해서 행복해 질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다가 선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열렬히 영화를 지지하며 나의 영화를 위해서 노력을 하고 만든다고 할 때에 그 목적이 어떤 것이든 성취를 했다면 그 이후에 다가올 죽음의 문턱에서 이겨낼 도리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생긴다. 난 허무주의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솔직한 감정을 기록하는 것이다. 결국 죽음 뒤에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현제 나의 의미가 생기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대답이 질문 자체로서 종결될 때 우리는 타인과의 영향과 관계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지점으로 건너뛰게 된다. 불교의 운명론에 입각해 스스로를 혼자 때어놓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애써 의미화를 시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결국 ’무’라는 것 즉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불교에서도 그것은 윤회를 거부당한 최악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다.
난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가 ‘죽음은 또 다른 여정’이라고 하는 말을 가슴 깊이 세기고 있다. 결국 어떤 것이든 본능적으로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붉은 원의 또 다른 의미는 만남과 사회이기도 하다. 결국 우릴 따로 때어 놓을 수 없기에 사람들의 어울림이 가장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나 역시 영화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이건 죽을 때 까지 변함없는 것이다. 사람이 있어야 영화를 만들고 영화는 사람들이 봐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멜빌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그가 영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에니메이션을 이용해 빨간 원을 그린 것은 그 의미가 분명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볼 때에 우린 이들이 누구를 어떻게 만나는가를 봐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일을 하고 주변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굴 만나는 가 어떠한 방식으로 만나게 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를 들여다보자 암흑가의 세 사람은 다른 범죄영화들과 달리 이들의 목적이 범죄 자체에 있지 않다. 애초 보석상 털이를 계획한 것은 코리가 아니라 교도소의 간수였고, 보젤과 얀세는 도중에 끌어들여졌을 뿐이다. 특히 얀센은 보석상 털이에 성공한 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코리와 함께 한다. 보석상 털이는 환각에 시달리며 죽어가던 얀센에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었고 그는 그것으로 이미 모든 대가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삶은 그렇게 결국 만남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다 끝이 나는 것 아닐까? 얀세는 삶의 나락으로 까지 가봤던 인물이기에 돈이 부질 없음을 알고 있다. 거기서 성숙한 인간의 자세가 나온다. 그리고 마테이 경감 역시 기를 쓰고 범인들을 감옥에 처 넣어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 빨간원을 그리게 될 것이다. 결국 원은 순환으로 인간인 이상 그 누구도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암흑가의 ‘세 사람’에 대한 설명이 극도로 자제된 채, 코리는 말없이 거리를 걷고 당구를 치며 얀센은 얌전히 총알을 만들며 사격연습을 한다. 감정의 절제, 불필요한 설명들이 빠지고 난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은 어떤 정서다. 고독감과 무력감 같은 것들. 영화에 대한 중독은 내러티브가 아니라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온다. 결국 이 말이 나의 많은 오해들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것은 아닐까. 우선 멜빌의 영화를 챙겨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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