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m

다시 찾아야 하는 한국영화 그리고 최후의 증인

JOB87 2010. 7. 23. 15:43

                이두용 감독 (1941년생)


1. 다시 찾아야 하는 한국영화.


 부끄럽지만 솔직히 한국영화에 대해 정말 무지하다는 것을 고백 한다.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내 나이 또래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 할 것이다. 사실 이제와서 한국영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뒤 늦은 행동들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자료도 턱없이 부족할 뿐더러 한국의 역사가 말해주는 바 일본의 영향이 컸음을 오히려 그곳에 더 많은 자료가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땐 정말 분노만 차오르니 말이다. 해방 후에도 영화를 하기에 우리의 환경은 엄청난 제약으로 둘러싸여져 있었음을 어린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봐야 했던 것은 영화교과서에 나온 영화들이 우선이었고 그 다음이 메니악한 영화들 그리고 개인적 취향을 가진 거장의 전작으로 갈리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나눈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분명 한국고전 영화들은 서양화들 틈바구니 속에서 대중들에게 무시당하고 괄시 받아왔다. 영화제를 통해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나 보여지고 끝이 난 것이다. 우린 또다시 뒤늦게 발견하여 이제야 다시 창고에서 끄집어내는 행동들로 한국영화 역사를 스스로 위로 하고 있다.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이 단지 문화적인 지킴이상이자 다른 한편으론 영혼의 정립의 과정인 것이다. 실제로 본인이 좋아하는 이와이 순지 감독이 2008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말하길 자신은 이치가와 곤의 영화를 보고 자랐으며 그의 영화가 곧 자신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난 이치가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어디서도 한국의 동시대의 감독들이 자신의 근원이 한국의 어떤 감독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이를테면 이런말들. 난 이만희 감독의 영화를 보며 영감을 얻는다. 난 김기영의 하녀를 통해 감독이 되길 결심했다. 등의...한국의 감독이 한국영화를 보고 영화를 하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아직 듣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좋은 한국의 작품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면.(물론 한국영상자료원-KOFA도 있다.) 칠인의 사무라이나 동경이야기나 우게츠 이야기를 정말 너무 쉽게 보듯이 우리의 것들을 어디든 쉽게 발견해서 볼 수 있었다면 한국영화는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2000년에 들어서야 영화학자들이 조금씩 나름의 한국영화의 계보를 정리하려는 운동이 일기도 했다. 참 좋은 일이다. 책도 몇권 출판되었다. 하지만 책을 구입하는 사람은 영화학도를 몇몇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우선 봐야 느끼는 것이 영화 아닐까? 맹목적으로 ‘그래 사실 우리 한국영화도 과거에 참 괜찮았어‘. 라고 말만 나불대는 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래전 NHK에서 오즈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그의 전작을 상영해준적이 있다. 공중파에서 과거 흑백영화를 틀어주는 것이다. 상상이 가는가? 그것도 프라임타임때 말이다. 모두가 알듯이 일본은 자신의 역사를 조작하면서 까지 그들의 정신을 지켜내려고 한다. 모든 분야에서 마차가지다. 일본영화의 혼을 지키려는 노력이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국가정 정책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틀 영화가 없는 탓이 절대 아니다. 이미 한국 방송의 정신은 정치와 자본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을 뿐이다. 스타들이 등장하는 예능이나 드라마를 통해 광고수익 올리기에 급급하거나 날치기로 중계권을 독점하거나. 수익창출에만 혈안이 되어있다. 

 그나마 영화계에서 그 사실에 대한 자각이 있었던 것인지 리메이크를(하녀-김기영,만추-이만희)하기도 한다. 보기좋은 일이다. 그래도
근원을 한국에서 찾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찾으려 드는 것을 나쁘다 말 할 수도 없지만 어딘지 씁쓸하다. 마치 부모 없는 자식이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투정부리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정말 근원의 힘은 절대적이다. 현제 활발히 활동 중인 선배 감독들은 지금의 우리와는 분명 다를 것이지만 우린 양부모를 찾으며 선배 감독들을 부모로 삼거나 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교육시킨다. 오히려 더 근원적으로 다가서야 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 말이다. 

 
  다른 나라들만큼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한 활동이 부족함은 인정해야 한다. 마틴 스콜세지는 필름파운데이션이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전 세계의 고전영화들을 복원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최근에 개봉된 대부part1도 그의 노력의 결실이며. 올해 칸영화제 에서도 두 편의 이탈리아 영화가 복원되어 상영되었다. (지금도 지속적으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이렇듯 이두용의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가 다시 발견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은 좋은 현상이다. 지속적인 발굴이 필요하다. 왜냐면 우리가 관심 가지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세계의 유명한 영화 연구가들은 일본영화 중국,대만영화 인도영화를 자국민들이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연구를 해준다. 우리나라도 그럴까? 집안에서 가족 앨범도 못 찾는 격인데 누가 관심이나 가져줄까? 우리 스스로 찾고 연구해야 한다.

 

1. 최후의 증인

 이 영화는 빠르다. 숨 쉴 틈 없이 치고 나가 버린다. 씬과 씬의 결합이 무척 거칠게 움직인다. 공간의 힘을 과감한 앵글로 설명해 준다. 영화의 시작에서 감독이 직접적으로 설명하듯이 이 영화는 무척이나 어둡다 처음엔 아예 잘 보이지도 않는다. 단지 헤드라잇과 가로등 불빛에 살며시 의지한 집 담벼락뿐 그리고 불현듯 첫 사망자가 발생한다. 거칠고 갑작스럽고 놀라움을 주는 편집과 사운드는 이 영화가 어떠한 느낌으로 진행이 될지 즐거운 예상을할 수 있다. 이어 두 명의 살인사건을 보여주고 오형사가 서장에서 임무를 부여받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지금이야 경찰되기가 무척 어렵지만 그때는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다. 대학 나온 것이 자랑이니 말이다.


어쨌거나 양달수가 죽었다는 것에 수사를 하러 나서는 오형사, 몸을 움츠리고 부리한 눈을 뜬 체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 특히 씬의 연결이놀라웠던 것은 영화 중반 황바우가 수감된 광주교도소를 시작으로 방문을 하는 장면에서 교도소를 이동하는 장면전환이 영화적으로 허용한 가능치를 넘어 서며 감정적으로 과잉이 되고 있음을 느끼한 부분이다.. 즉 생략이 없다는 것. 한 교도소에서 어디로 이감이 되었다고 말하면 바로 다음 장면에 브릿지 없이 그 흔한 인서트 없이 해당 교도소로 이동하는 격이다. 그걸 계속 적으로 반복 하다 보면 우린 정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때 더 집중이 되는 이유는 오형사는 아무리 공간을 이동해도 지치지 않는 다는 것에 있다. 빠른 속도로 공간을 이동 할 때에 육체적인 힘듦을 묘사해주기 마련인데 이 영화에선 이미 처음부터 불필요 하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피를 흘리면서도 폭우가 쏟아져도 그는 앞으로 나아간다. 에너지는 분쇄되지 않는다. 쉬지도 않는다. 응축되고 쌓여만 간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살로 폭발하고 마는 것이다.

   

3. 감독, 이두용

이두용의 공간 묘사는 거칠면서 상당히 실험적이다. 과거 액션영화를 주로 찍어왔던 감독 답게 물로 편집의 스타일의 과감함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방에 들어왔을 때 그러니까 어떠한 공간에 이동을 하게 되어 오형사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좁은 공간에서 그 둘을 잡기 위해선 광각렌즈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은 의도를 위한 사용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방법적인 의미의 렌즈선택이기도 하다. 이후의 좁혀진 인물 원샷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대화 장면에 힘이 붙는다. 인물의 동작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면서 촬영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제일 처음 정보를 얻게 되는 장면에서 술집 주인과 대화를 나눌 때 주인이 먹는 사발의 움직임 술을 따를 때의 손동작 같이 손의 움직임에 포인트를 주어 장면을 이동한다. 기본적으로 말을 할 때에 카메라를 비추며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을 위해 걸고 찍기를 할 때에 세밀하게 인물의 동작 하나하나를 연출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장면은 방에 걸린 초라한 백열전구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처럼 움직이는 속도를 세밀하게 조정하면서 찍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출은 영화감상이 끝난 후 그 모든 것이 실제의 공간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알게 되면서 우린 그 사건이 영화적 허구, 가상의 것이 아닌 리얼함으로 다가오게 되면서 섬뜩함과 처절함 그리고 시대의 어두움을 다시 느끼게 된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가 표현하는 어두움은 반복되고 오히려 그것이 가려서 만들어낸 영화적인 조명이 아니어서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어두움 가운데 살며시 등장하는 인물 혹은 어떤 사물들. 그것에 우린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고 의지하게 된다. 화면 안에 제공되는 정보의 정직함은 오로지 소리로 의존하게 되며 시각적인 것은 이렇다 할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로지 어둠만을 우린 보게 되며 동시에 밝음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인 인간의 의지다 결국 하명중이 표현하는 어두움은 어둠 그자체로 시대를 설명하려는 의도라기보다 그 어둠 안에서 밝음을 한번 찾아보라는 의도도 분명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의 빛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시대를 표현하는 지점을 명확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이 당시의 영화안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 양식은 어떨까. 과연 이것이 사실적인가 라고 우린 말할 수 있을까? 시대를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허용이 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 알면 될까? 특히 화가 났을 때 삿대질 하며 몸을 밀어 붙이는 행위는 다소 유치하게 비춰지기도 한다. 더빙된 목소리와 낯간지러운 대사들 너무나 착하고 직설적이고 문어체 적이며 유치원생이 들어도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는 대사들을 쓰게 된다. 물론 현대적이 아닌 게 잘 못된 것은 당연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영화들을 보게 되면 그들의 연기가 유독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모습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모든 영화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극적인 양식의 연기 톤과 고전적인 연기 방식이 그대로 표현되어 감상에 방해를 준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연기 방식은 물론 일본과는 달리 상당히 사실적으로 연기한다. 어쨌든 배우들의 현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과장된 연기들은 영화에 큰 힘을 부여해준다. 

 이렇게 우선적으로 배우들의 에너지와 함께 카메라의 힘은 트랙과 줌으로 보여지는 데 과도한 줌의 사용이 실험적이다 라고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줌의 사용은 모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싫어하는 편이다. 줌은 뮤직비디오에나 쓰는 것이 맞는 효과가 아닐까? 난 줌이 사실성을 상쇄시켜 버린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카메라의 위치를 노골적으로 관객에게 인지시켜주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트랙과는 다른 의미다. 트랙은 줌보다 조금 더 감정적인 움직임이다. (브루주아샷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하지만 줌은 기계적인 시점의 확대로 보는 주체가 누구인지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바라보는지 알게 만든다. 난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다는 것이다. 줌은 눈을 다가가게 트랙은 마음을 다가가게 한다.
베리린든에서의 엄청난 줌의 사용은 적어도 의미를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이두용이 사용한 줌은 과감성과 실험적인 느낌 그다음 어떤 영화적인 의미로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주 단순히 이 영화의 그런 스타일이려니 하며 생각하는 정도다. 없어도 되는 것이다. 있다고 해서 영화의 질이 더 좋아 졌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넌센스 이긴 하지만 난 오히려 그 벌어지는 이미지들을 컷을 나누었다면 오히려 더한 걸작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본다면 북한의 사회주의를 이영화가 비판하고 있는 것인지 영화를 계속 보고 있노라면 공권력에 대한 도전처럼 보이기도 하고 시대를 의식하는 감독의 모습이 물론 영화 시작부터 자막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예민한 부분들을 영화로 건들면서 하고 싶은 말을 잘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이들이 이렇게 아파하는 이유는 6.25전쟁이고 이념의 싸움이다. 전쟁이 이들을 코너로 몰아세운다. 인간의 이념에 대한 회의는 공비들을 자수를 하게 만든다. 체제에 대한 옹호는 한 순간도 비춰지지 않는다. 욕망은 궁지에 몰려 윤간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이것은 단순히 공비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극한의 상황속에서 남성이 많이 모이면 본능적으로 편을 가르고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은 먹을 것이나 여자나 본능적인 우의를 위한 것이다. 여튼 뭔가를 가지고 싶어 한다. 남자들 만의 집합은 편협적이게 될 가능성이 많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난 마초가 싫다. 남성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들 남자의 미덕이라고 하는 것과 의례 남자라면 이래야한다고 말하는 것들 모든 것이 싫다. 같은 의미로 여자도 동일하게 해당된다. 인간을 성으로 구분 지으면서 암묵적인 의무를 부여하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힘이 들었던 이유도 그것이다. 거칠고 집념이 강한 오형사는 여자의 수준을 그때의 딱 그 수준만큼 비참하게 만들어 준다. 난 지혜가 무척 서글플 정도로 안타까웠다. 왜 시대는 여성의 입을 막았을까 하는 고민들과 그 주체는 분면 남자일 것이다. 라는 의심 하지만 남자들의 무식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거부감이 측은함으로 다가 오기도 한다. 남성의 영화는 항상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된다. 그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런 작품이 대한민국에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리고 정말 너무 궁금해진다. 한국의 영화들 우리가 흔히 아는 한국영화의 걸작 말고도 최후의 증인과도 같은 숨겨진 걸작들이 또 있지 않을까? 감독 자신도 알지 못했던 후대의 감독들과 평론가들을 통해 발견되는 걸작들이 또 나왔으면 한다. 한국영화의 혼을 정립해야 한다. 우리의 것을 소홀이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든다. 지금의 한국영화. 그리고 지금 10대들. 이들은 지금의 내 또래와는 또다른 한국영화의 정서를 경험하고 있을 것이고 그들 가운데서 동시대의 감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