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한계 혹은 마더의 한계.
봉준호 감독.(1969년생)
1. 봉준호의 한계
마더가 개봉한지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대중들의 관심과 비평의 찬사가 지나간 뒤 남은 고요한 시간. 나는 왜 이제야 이 영화를 다시 불러내 글을 쓰는가. 그것은 이제야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생각이 정리되었다는 뜻이고 마더를 보고난 뒤 느낀 불길함을 쉽게 지울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라도 이 불길함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비평이 마더가 주는 불길함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인간의 깊은 심연의 광기어린 한계에 닿고자하는 감독의 처절한 몸부림, 사회 깊숙이 감춰진 어두운 내면의 형상화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름으로 일그러지고 그늘진 혜자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잠시 멈추고자 한다. 비평의 담론이 얼굴로 모아지고 이 영화를 얼굴에 담으려고 할 때 나는 그 순간 잠시 멈추고 얼굴에서 빠져나오기를 제안한다. 나는 지금 마더의 마지막 장면, 혜자가 광기어린 춤을 추고 그녀를 태운 버스가 나아갈 때 그리고 그것을 감독이 클로즈 업으로 버스가 아닌 혜자를 보여줄 때 그 버스를 멈추고자 하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이다. 나의 글은 혜자의 얼굴에서 벗어나 버스를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이다. 봉준호는 다른 그 어떤 감독보다 시나리오를 잘 쓰는 감독이다. 잘 쓰여 진 시나리오란 캐릭터의 묘사. 그리고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한 시나리오를 말한다. 봉준호는 애초에 마더라는 캐릭터를 대한민국에서 전형적인 어머니상을 가지고 있는 김혜자라는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다. 이 말은 김혜자의 모습 그대로 시나리오 상의 마더라는 창조된 캐릭터에 묻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감독이 따로 인물에 부여한 성격이 아니라 김혜자의 모습, 그 육체에서 표현되는 이미지, 표정의 지을 때의 주름의 형성, 그림자 스스로 성격이 되게끔 어느 정도 여지를 두고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영화는 혜자의 얼굴을 중점적으로 포착해 낸다.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 즉 내러티브에 담겨질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표현하는 사건으로서 기능한다.
어두운 밤 혜자가 불빛이 군데군데 켜진 마을을 내려다 볼 때 불빛은 어두운 얼굴의 눈이 되고 마을은 혜자의 얼굴에 반영된다. 그 만큼 이 영화는 혜자의 얼굴이 아니었음 표현되지 못한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그때 얼굴은 탄탄한 내러티브로 구성된 영화를 넘어서게 된다. 이 점이 아마 봉준호가 전작들 보다 멀리 나아간 지점일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보여 진 송강호의 얼굴은 아직 내러티브에 종속되어 있다. 그때의 얼굴은 아직 연기하는 얼굴이다. 그것은 송강호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살인의 추억에서 그는 특유의 입담과 제스츄어로 그 본래의 육체를 가린다. 거기서 그는 연기하고 있는 배우 일뿐, 그 자체로 영화가 되고 이미지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의 송강호의 얼굴은 얼굴이라기 보단 시선이다. 카메라 너머 이 영화를 보고 있을 우리들 혹은 그 속의 범인, 아니면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 모두를 범인으로 놓고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 시선 역시 불길함을 가진다. 그것은 카메라 너머를 바라보고 있지만 온통 적으로 둘러 싸여있는 공간에 있는 것마냥 가로막힌 시선, 어떤 벽에 가로 막힌 시선이기 때문이다. 봉준호는 이때부터 자기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이미 완결된 상태에서 게임을 벌이듯 영화를 진행한다.
그의 영화는 술래잡기와 비슷하다. 한정된 공간을 정해두고 술래는 아이들을 잡으러 다닌다. 공간이 한정되어 있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피해보지만 결국엔 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절망적인 게임. 봉준호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공간 밖을 탐색하지 않는 걸까? 마치 이 공간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그는 영화를 찍는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봉준호뿐 만이 아니라 한국영화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한국영화는 철저히 정해진 리얼리즘 안에서 진행된다. 나는 지금 환타지로의 도피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당신은 당신이 그어놓은 리얼리즘의 한계를 나에게 고백하는 것이다. 영화의 역사 안에서 리얼리즘 논쟁은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그때 마다 리얼리즘의 경계는 계속 변화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변화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영화는 결국 리얼리즘이란 경계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 한국영화가 주어진 리얼리즘의 바탕 안에서 진행되기 보단 그 안에서 시작하되 그 경계 밖을 탐험하는 영화가 많이 나왔음하고 바란다.(이창동의 오아시스는 환타지로 도피한 경향이 보이고 박찬욱의 박쥐는 리얼리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아니다.) 봉준호는 시네아티스트가 되기엔 너무 시나리오를 잘 쓰고 영화를 잘 만든다. 이 말은 시네아티스트의 영화들이 못쓴 시나리오, 못 만든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반대관계로 사유하길 그쳐야 한다. A=B를 B=A와 같게 놓는 건 수학에서 성립하는 공식이지 삶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삶은 공식이 아니다. 삶에서 A=B를 B=A로 놓는 순간 많은 것이 변화한다. 그것은 의미가 변한다는 것을 뜻한다. 누군가 이런 방식으로 당신을 설득시킬 때 당신은 무엇이 변하는지 잘 생각해보고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시나리오를 잘 쓰고 영화를 잘 만든다는 말은 그 만큼 자신의 영화가 부서지는 걸 두려워한다는 걸 뜻한다. 봉준호는 그의 영화가 부서지는 걸 두려워한다. 영화가 새로운 공기를 불러오고 미래를 열어 보이기 위해선 스스로 부서질 각오를 해야 한다.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이 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가올 미래를 향해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잘 만든 영화보다 좋은 영화를 원하고 좋은 영화란 잘 만드는 걸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다가올 미래를 향해 문을 여는 것, 문이 없다면 스스로를 부서트리는 한이 있더라도 문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의 영화는 잘 만든 영화이지 좋은 영화는 아니다. 그렇다고 나쁜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다만 사람들이 잘 만든 영화와 좋은 영화를 동의어처럼 사용하는 걸 경고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점점 나아가는 감독이다. 살인의 추억이후 괴물에서 그는 내러티브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이미지를 사유하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간다. 그는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의 시선을 에워싸고 있는 불길함을 알레고리로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CG로 만들어진 괴물의 모습 그것은 내러티브 안에서 이미지를 구연해내는 봉준호의 방식이다. 이 이미지는 나중에 올 마더에서 혜자의 얼굴을 예고하는 듯하다. 한강이라는 익숙한 일상의 공간에서 낯설게 갑자기 등장하는 이미지. 아니, 불쑥 습격해서 모든 걸 뒤엎어버리는 이미지. 일상에 일어나는 균열, 사라진 아이, 살인의 추억에서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듯이 괴물에서도 아이는 죽은 채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엔 대신하는 아이가 있다. 딸을 대신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아이. 그렇게 송강호의 시선은 어두운 심연을 향해 다시한번 물음을 던져진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에서 공통된 봉준호의 태도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여기서 미래는 아이가 아니라 괴물이다. 그리고 송강호가 바라보는 어둠이다. 사라진 괴물. 하지만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괴물. 봉준호에게 미래는 왜 항상 괴물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일까. 하지만 아직까지 그는 어두운 심연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 결단을 내리지 않았고 자기 스스로 해답을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해답은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끝나고 만다. 그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질문하길 그쳤다. 다가올 미래를 막았듯 다가올 질문을 막았다. 그는 이 질문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을 알고 질문을 던지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도망친다. 무엇으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는 질문으로부터....어떻게? 바라보길 그치고 망각의 춤을 춤으로서... 마치 카리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처럼...
미래는 현재를 전복시킴으로서 성립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두려움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희망찬 미래를 제시해주기 위해 그래서 해피엔딩, 혹은 인간승리의 휴먼드라마를 제공해주고 감동의 눈물을 돈으로 환산하기 위해 상업영화가 온갖 꼼수를 부리는 동안 희망이란 단어는 우리에게 덧없는 것, 현실과 동 떨어진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기만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가주의감독들, 영화의 상업성에 온몸을 던지기보다 그 안에서 자신이 하고자하는 영화의 길을 가는 감독들은 이런 영화의 상업적 태도에 저항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를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미명하에 희망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불길함에 몸을 기댄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반문한다. 그것은 희망이란 단어의 잘못이 아니라 희망이란 단어를 잘못 사용한 자들의 잘못이라고. 그렇기에 상업적 태도에 저항하기 위해선 오히려 더욱더 희망이란 단어를 버리면 안 된다고. 그 순간 우리는 영원히 희망이라는 단어를 잃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희망이란 단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를 찾아주는 것이다. 상업적인 목적에 의해 퇴색되고 왜곡된 희망이란 단어를 다시 되찾아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봉준호는 질문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은 붙잡히지 않았다. 영화감독으로서 범인을 붙잡고 못 잡고는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다.(살인의 추억은 그놈목소리가 아니다.)그리고 그는 질문해 본다. 우리는 왜 범인을 붙잡을 수 없었는가? 그 이유는..... 봉준호는 마지막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시선을 던진다. 그때 그 줄임 말속엔 우리 모두가 공범 이였다 라는 잔인한 고백이 숨어있다. 그리고 괴물에서는 살인의 추억에서 하지 못하고 줄임말로 남겨둔 채 시선으로 대신했던 것을 좀 더 분명히 드러낸다. 괴물의 형성화, 고군 분투하는 가족, 이웃의 외면, 사회속의 고립. 총을 든 송강호가 바라보는 어둠속의 풍경.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에서 던졌던 질문을 CG를 통해 시각적으로 좀 더 분명히 제시해준다. 그리고 도착한 마더는 거기에 대한 봉준호의 결단, 태도이다. 여기서 그는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기를 그친다. 혜자는 더 이상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와 괴물의 송강호처럼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광기어린 춤을 출 뿐이다. 봉준호는 이것을 한풀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겐 망각의 춤이라 여겨진다. 그는 더 이상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죄의 순환. 그리고 언제 또다시 일상을 침범하고 가족을 사라지게 만들지 모르는 연쇄살인범, 괴물. 그리고 마더에서 도준을 습격하는 바위. 그리고 혜자를 습격하는 도준의 기억. 다가올 미래의 불안감이 그로 하여금 미래를 가로막게 만든다. 여기서 봉준호는 선언하듯 말한다. 미래가 끔찍하고 불안하고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기에 나는 그 문을 막고 더 나아가길 포기한다. 그리고 차라리 그 안에서 죄책감을 잊기 위해 망각을 춤을 추겠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자살적 제스츄어. 이 순간 공기는 점점 탁해지고 질식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나타난다. 미래를 향한 문이 닫혀 있기에 더 이상 공기는 순환하지 않고 갇혀 있다. 그리고 탁한 공기 속에서 그 안의 사람들은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 그 순간에도 봉준호는 문을 열지 않는다. 문을 여는 순간 공기를 타고 죄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는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결벽주의자적 태도를 취한다. 마더에서 그는 너무나도 성급한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자신의 질문을 좀 더 붙들고 있어야 했다. 좀 더 고민하고 생각한 뒤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 혹은 결단을 다음영화로 미뤄야 했다. 그래서 죄의 순환, 다가올 미래의 두려움. 그 밑에 가려진 좀 더 본질적인 시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했다. 그는 히치콕의 싸이코에서 주인공의 얼굴이면에 가려진 어머니의 목소리. 그리고 해골 즉, 죽음이 불러온 허무와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도망쳐 버린다. 다가올 미래는 인간의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했다. 마더는 히치콕의 영화와 상관이 없다. 관련 있다면 단지 엄마와 아들의 관계뿐이다. 무엇보다 마더에서의 시점샷과 클로즈 업은 히치콕의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히치콕은 영화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감독이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탄탄한 이야기 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완벽한 콘티 하에 영화를 찍어나가면서도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미지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이미지가 무엇인지 사유한다. 그것이 그의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이때 이미지는 사라지고 나타나는 경계를 뜻한다. 그때 죽음은 사라짐이 된다. 이 지점에서 히치콕은 오즈와 마주치고 이들 사이에 코엔형제의 유니크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자리한다. 영화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주제는 언제나 이미지란 무엇인가이다. 이것을 인간의 주제로 바꿔 말하면 삶이란 무엇인가? 생(나타남)과 사(사라짐)는 무엇인가이다. 여기에 히치콕의 맥커핀과 클로즈업, 시점샷이 자리한다. 클로즈업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지점이고 시점샷은 나타나는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라보는 자의 눈은 클로즈업이다. 하지만 마더에서 나는 이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마더에서 나타남과 사라짐은 채워짐과 비워짐이 대신한다. 거기서 비워짐은 그대로 있을 수 없다. 항상 무언가가 계속해서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봉준호 영화의 내러티브방식이자 사유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은 있었다. 그것은 CG였던 괴물이 혜자의 얼굴로 형성화되는 순간이다. 이때 얼굴은 히치콕의 클로즈업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내러티브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엇 바로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봉준호는 그 얼굴을 내러티브 속에 가둔다.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 리얼리즘의 한계 속에서 광기마저 질식한다. 이 순간 봉준호는 다시한번 선택해야 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얼굴이 내러티브 안에 종속되어 이미지가 되지 못했다면 클로즈업을 버리고 롱숏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그래서 이미지를 삼켜버리고 질식 시킨 내러티브 구조를 보여주고 자신의 영화를 부셔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얼굴에 심취해 있었다. 어쩌면 그 역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면서 혜자의 얼굴과 광기어린 춤에 빠져들어 모든 것을 잊고 싶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혜자는 버스를 타고 심연으로부터 도망친다. 그것은 탈출, 출구로 향한 나아감이 아니라 명백히 도피 행각이다. 더 이상 바라보지 않음. 모든 것을 잊고 도망치겠다는 선언. 그 순간 봉준호는 잊고 있었다. 지금 혜자가 춤을 추고 있는 곳은 첫 장면에서 춤을 추던 들판이 아니라 버스라는 사실을... 그리고 버스는 혜자가 춤을 추는 그 순간에도 미래를 향해 맹렬히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자신이 문을 잠그고 거부하고 외면하고 잊어버리려고 할수록 더욱 맹렬히 그 문을 두드리고 부순다는 사실을...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일수록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뜨고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홍상수의 극장전에서 주인공의 중얼거림...‘생각해야 돼 생각해야 돼...’ 이미지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생각해야 한다.
2. 마더의 한계
지금 이 시점에서 이글을 쓰는 나는 인간 내면의 깊이 혹은 시대의 징후 보다 좀 더 시급한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앎이 포괄할 수 없는 것,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도 상관없다. 오직 그 바탕위에서 만이 앎이 형성되고 인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피하려고 할수록 더욱 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대한 영화는 항상 이것의 표현 이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봉준호는 이것으로부터 도망쳐 버렸다. 이 영화는 사실 대심문관(도스토예프스키' 카리마조프 형제들'중에서)의 고해성사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영화엔 그리스도의 입맞춤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감옥에서 내보낼 수 없는 것이다. 참고로 대심문관은 다음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리스도를 화형 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전날 감옥을 찾아와 그리스도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내면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는 감옥에 갇힌 채 화형이 집행될 내일을 기다리는 것 같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인간내면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병적인 집착으로 느껴질 정도로 깊이 파고드는데 혈안이 된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인간 내면 깊숙이 얼마나 파고 드느냐보다 깊숙이 파고들어간 만큼 거기서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는 질문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사실 거기서 역량이 결정된다. 여행은 떠나는 것만큼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다들 여행을 떠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돌아오는 것엔 관심이 없다. 떠나고 돌아옴이 여행을 성립 시킨다.그리고 탄광에 들어가 석탄을 캐는 것만큼 탄광을 나오는 것도 중요하다. 보석을 찾기 위해 땅속 깊숙이 파고 내려간다. 그래서 보석을 찾았다 모두들 그 보석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자신이 지금 땅속에 있단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깊이 내려갈수록 땅은 안정되지 못하고 요동치고 흔들리며 예측할 수 없다 지금 땅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모두들 보석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긴 듯하다. 어서 빨리 그 보석을 가지고 다시 땅위로 올라와야 한다. 그것이 지금 시급한 과제이다. 보석의 아름다움과 그 보석을 발견한 사람에 대한 칭찬은 땅위로 올라온 그 다음에 해도 상관없다. 고통은 피난처가 아니다 무기고다 현실과 싸워 이겨내기 위해 무기를 찾으러 고통 깊숙이 내려간다. 그리고 무기를 찾아서 빨리 그곳을 빠져 나와야 한다. 만약 무기를 찾지 못했다면 그곳에 너무 오래있지 말고 우선 올라온 다음 숨을 고르고 다시 내려가서 무기를 찾아야 한다. 만약 당신이 진정 고통을 껴안고 죽고 싶다면 자신의 고통을 이해할 분신 같은 존재를 밖으로 보내야 한다. 떠남은 돌아옴에 의해 성립되고 이때서야 고통은 희생으로 성립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속의 무기는 잊혀 지지 않고 기억 된다. 고통은 현실의 도피처가 되선 안 된다. 우리는 영화에서 인물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고 견디고 있는지를 보기보단 그 인물이 고통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고통을 대하는 인물의 태도이자 영화의 태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고통이 배움이라면 그것은 고통에서 빠져나온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다.
이 영화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내가 생각하기에 마지막 씬에서 중요한 건 혜자의 얼굴이 아니라 버스다. 이상하게 모두들 혜자의 얼굴. 그리고 혜자가 추는 춤에 빠져있다 그래서 버스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 아니 보기 싫은 걸까? 안보는 걸까? 감독 역시 의도적으로 버스를 인식 못하게 혜자의 춤에만 카메라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노을 진 배경과 흔들리는 카메라는 버스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시킨다. 모두들 혜자의 춤에 홀려 영화의 미학을 얘기할 때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버스는 계속 가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왜 아무도 이 버스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영화 내적으로 계속 보여 진 혜자의 얼굴 클로즈업에 다들 홀려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 거기서 빠져 나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버스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버스를 멈추어야 한다. 미학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우선 버스를 멈추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 영화에 대한 미학과 연출력은 이미 너무 말해졌기에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그것보다 버스를 멈춰 세워야 한다. 이 버스는 대형 참사를 불러올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답을 제시해 줄 수 없다. 던져진 질문자체가 애초에 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다만 영화는 인물과 더불어 관객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다. 질문을 던지고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 그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유일 한 것이다. 우리는 임권택과 오즈의 결단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임권택은 차를 급정거 시켰다(길소뜸) 오즈는 이륙하려는 비행기를 고장 내서 멈추게 했다(오차츠케의 맛) 물론 임권택의 인물은 잠시 멈춘 뒤 다시 떠난다. 오즈의 인물도 다시 돌아온 뒤 떠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잠시 멈춰 세워 생각할 시간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멈추기는 커녕 버스의 존재를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물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한 광기 어린 춤을 추고 있다 나는 도저히 이 결말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받아들 일수 없다 나는 이 버스가 멈추어야 된다고 생각 한다. 멈춰 세울 수 없다면 카메라가 혜자의 얼굴 클로즈업에서 빠져나와 위태롭게 달려가는 버스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영화 속 인물과 함께 망각의 춤에 빠져있을 때도 시간은 흘러가고 버스는 계속 가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