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이끼>와 <인셉션> 보기를 포기하고 미술관을 향하다.

JOB87 2010. 7. 25. 01:14


      오귀스트 르네 로뎅 (Rene-Francois-Auguste Rodin)


모두가 다 이끼와 인셉션에 대해 글을 쓰려고 열을 올립니다. 

그것에 굳이 제가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글은 이끼나 인셉션에 대한 리뷰글이 절대 아님을 밝힙니다.




영혼의 제스츄어.

 

 원래 영화를 보러갈 계획이었지만 마음을 바꾸고 로댕 전을 보러가기로 했다. 최근 개봉한 <이끼>와 <인셉션>이 궁금하고 보고 싶었지만 영화가 가진 이야기능력, 무한한 상상력이란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힘 앞에 자신이 서 있는 현실을 잃어가는 내 모습이 보기 싫었고 그런 영화에 대해 환멸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고 무자비하게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펼치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물론 나는 위의 두 영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볼지도 모른다. 다만 위의 두 영화를 보러가려 할 때 마다 나를 붙잡고 망설이게 하는 것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영화가 아닌 조각을 선택했고 로댕전이 열리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갔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조각품을 보고 싶다기보다는 로댕전이 보고 싶었다. 로댕이 조각한 작품들. 무엇보다 이번에 열리는 로댕전은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현재 내가 가진 영화에 대한 고민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지 않을까 생각해서였다. 나는 전시회가 처음이다. 조각은 물론 미술전시회에 가본적도 없다. 그래서 어떤 놀라움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서울시립미술관도 처음이다. 도착해서 본 시립미술관은 기대했던 것보단 작았다. 아니...아담하다는 편이 더 적절하다. 마치 숲속에 있는 작은 미술관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다.

 


 표를 끊고 표지판을 따라 입구로 들어간다. 처음 내가 마주한...나를 맞이한 작품은 <신의 손>이였다. 석고상 위로 하나의 손이 튀어나와 있다. 그리고 조금 비켜나서 뒤쪽으로 가보면 그 손안에 아담과 이브로 보이는 두 인간의 조각상이 있다.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성인남자의 손 2~3배정도랄까?(나는 이상하게 조각상들이 다들 클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난 기억에 의존해서 글을 쓰기에 그 크기마저 정확하지 않지만 내 기억엔 그렇게 남아있다. 처음 내가 느낀 건 놀라움보다는 당혹감이었다. 대단하다, 똑같다, 사실적이다, 잘 만들었다 가 아니라 말 그대로 어떡하지? 였다. 


 조각 상 앞에 선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니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손’앞에 서 있는 나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라고 거듭 물었다. 어떤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마음 한구석으론 빨리 지나쳐 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작품들을 지나쳐 갈순 없다. 단순히 비싼 표 값(12000원)때문이 아니라 여기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거부 혹은 도전, 저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멈춰 세운 작품은 나의 시간에 저항하고 있었다. 아니 살아있는 내가 견뎌야하는 시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나의 몸은 조각상에 의해 멈춰버린 시간을 계속해서 흘러가게끔 나의 발을 재촉하며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조각상은 이런 나를 멈춰 세웠다. 결국 나는 멈춰 섰다. 그리고 바라본다. 흘러가던 시간이 멈춰 선다. 나는 조각상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본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사용된 카메라기법처럼...그리고 계속해서 무언가 보려고 노력한다. 혹자는 여기에 영혼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또는 인물상에서 풍부한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엔 영혼도 감정도 없다. 아무리 내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보면서 살펴봐도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엔 그저 텅 빈 손이 있고 다른 조각상들 역시 감정도 영혼도 다 빠져나간 텅 빈 얼굴과 신체...형상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내가 보는 건 조각칼에 의해 깍여진 면이다. 거대한 석고에서 깍여져 나간 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표현에 대해 쓴 글을 본적이 있다. 여기에 잠시 그 글을 인용해본다.


표현이란 무엇일까? 아니 나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낯선 방에 들어설 때의 느낌이다. 여기 누가 있다. 라는 감각을 들게 만드는 것.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런 판단을 내리게 하는가? 이때 공기는 더 이상 기체가 아니고 고체가 된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사물들은 조각이 된다. 이 방은 사실 거대한 조각상이다. 그 방에 살던 사람이 온몸으로 조각한 흔적들...아침에 일어난다. 창밖으로 구름한 점 없는 하늘이 보이고 일어나 앉는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는다. 아무 생각도 미세한 움직임도 없이 앉아 있는다. 방안을 감도는 공기는 기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고체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움직임에 대해 나의 몸이 닿는 것들에 대해 신중을 기하는 중이다. 나의 몸은 조각칼처럼 날카로운 면이기에 조금의 움직임도 그대로 공기에 새겨 버린다. 이 순간 방안의 사물들 역시 공기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모두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물질이 되어 버린다. 나는 아직도 가만히 앉아있다. 이것은 석고 앞에 선 조각가의 심정이다. 나의 몸짓, 시선하나에 방은 나의 흔적을 새겨버린다. 나의 움직임은 고체가 된 방안의 공기를 가르고 갈아질 틈은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한다. 나는 온몸으로 방안에 나를 새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의자에 앉을 때도 컵을 들 때도 공기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컵에 나의 움직임이 새겨진다. 내가 사는 방은 그렇게 내가 조각해 놓은 공간과도 같다. 그 방은 나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조각상을 대하는 심정일 것이다. 방은 조각칼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는 석고와도 같다. 이를 통해 방안에 들어 온자는 여기 누군가 있음을 느낀다. 


 로댕이란 조각가가 석고덩어리를 응시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조각칼로 덩어리를 깍아 내고 머릿속에 그린 형상을 조각해낼 때 그때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반복되는 조각칼의 움직임에 의해 깍여 나간 석고파편들. 그리고 석고표면에 남긴 흔적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흔적들은 로댕이 조각하는 동안 흘러간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조각을 지금 나는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 조각은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지 않는다. 완성된 조각은 말 그대로 시간의 정지이다. 봉인된 시간 혹은 사멸된 시간. 하지만 조각을 보고 있는 나는 여전히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 이때 나는 어떤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 든다. 여기 살아있는 나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그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지만 여기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영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다. 나와 작품사이에 이렇듯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어쩌면 이 강은 건너선 안 되는 강인지 모른다.) 이때 조각상은 우리가 영혼이나 감정이라 부르는 것마저 송두리째 비워진 상태로 존재한다. 우리가 영혼이라 감정이라 부르는 것은 조각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우리에 의해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조각상은 그렇게 텅 빈 채로 있다. 마치 우리는 감정이나 영혼이 조각상에 있는 것처럼 얘기해선 안 된다. 조각상은 다만 우리에 내재된 영혼과 감정을 일깨워 줄 뿐이다. 어떻게?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는 조각상을 보고 무언가 없음을 느낀다. 조각상의 없음을 통해 우리는 있음을 느낀다. 조각상이 보여주는 건 감정이나 영혼이 아니라 그 제스츄어이다. 영혼이 아닌 영혼의 제스츄어. 그것이 곧 조각이다. 조각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느낀 건 바로 이 제스츄어였다. 흔히 우리가 모습이라고 부르는 것. 물론 조각마다 이야기와 테마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 우리가 영화나 소설에서 알고 있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각은 모든 것이 비워져 있다. 거기엔 시간마저 비워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이해하는 방식, 인과관계, 전후관계로 조각이 담고 있는 걸 이해하려는 순간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 순간 눈앞의 조각상은 모습을 감추기 때문이다. 여기엔 살아있는 우리에게 완강히 저항하는 무언가가 있다. 조각된 인물들의 모습은 그 순간에 멈춰 서버린 기분이 든다. 순간이 영원이 되어버린 지금. 그리고 조각된 인물들은 혼이 나간 사람같이 느껴진다. 혼은 이미 빠져 나가고 빈 껍데기, 혼이 남겨놓은 제스츄어만 있는 상태. 빈 번데기 껍질만 남아있고 나비는 이미 날아가 버린 상태. 조각은 빈 번데기껍질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술을 대한다는 건 살아있는 존재로서 다가갈 수 없는 어떤 한계를 의미하는 듯하다. 조각 앞에선 그게 더욱 절실하다. 미술이 주는 색채의 유희 혹은 영화나 소설이 주는 이야기의 매혹이 조각엔 없다. 조각은 말이 없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쳐다보고 심지어 손을 댄다고 해도 그저 그렇게 그런 모습으로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조각은 공간위에 있다. 우리의 시야는 언제나 180도 선에 머문다. 그래서 공간을 점유한 채로 있는 인물을 볼 때 나는 시야의 한계를 경험한다. 언젠가 ‘미술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시간 때 교수님이 세잔은 회화에서 조각을 이루어내려는 불가능한 시도를 했다고 했는데 이제야 그 말을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이리저리 자리를 움직이며 거기 있는 인물상을 관찰한다. 앞에서 말한 180도 역시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의 눈은 두 개이고 각각의 눈이 그려낸 시야에 중첩되는 공간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 때문에 우리는 중심을 잡고 사물을 보고 생활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인물상의 한 면만 보게 된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다른 면을 상상해 전체형상을 그려본다. 그렇게 나의 눈과 두뇌는 내 앞에 서있는 조각상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새롭게 조율해나가면서 전체를 조망한다.

 

 

 지옥문에 대한 설명이 보이고 지옥문의 부분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이 양쪽에 위치해 있고 그 사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 볼 때는 몰랐는데 두 번 보고서야 <아담>과 <이브> 사이에 <생각하는 사람>이 위치해 있다는 게 보였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문 위 가운데 자리 잡고 앉아 고통을 겪는 여러 인간들을 바라본다. (물론 <생각하는 사람>은 독립된 조각으로 존재하고 전시되어있다.) 이때 생각하는 사람은 그 경계에 위치한 인간이다. 지옥과 천국사이, 아담과 이브가 있던 낙원과 추방된 곳 사이. 나는 조각에서 제스츄어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든 의문. 이 의문은 사실 로댕 전 이전에 생긴 것인데 동양의 <반가사유상>에 대해 생각함으로서였다. 모두가 알다시피 <생각하는 사람>은 어딘가에 앉아서 한쪽 손을 턱에 괴고 있는 사람의 자세이다. 그리고 동양의 <반가사유상> 역시 한쪽 손을 턱(사실은 볼에 가깝지만...)에 대고 있고 한쪽다리는 땅에 내리고 한쪽다리는 가부좌자세를 취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 모두 생각하는 자세에 한쪽 손을 턱에 대는 것이 공통된 생각이었던 거 같다. 왜 한쪽 손을 턱에 대고 있는가? 나는 그것보다 이 자세가 균형 잡힌 자세가 아니라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자세임을 말해두고 싶다. 균형 잡힌 자세는 허리를 곧게 펴고 좌우대칭이 완벽한 자세를 말한다. 좌우균형이 잡힌 상태. <생각하는 사람>은 두 다리를 균형 잡힌 상태로 모으는 대신 허리를 굽히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허리를 펴고 있는 대신 한쪽다리는 땅에 두고 한쪽다리는 가부좌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두 조각상모두 한쪽 손은 턱(볼)에 대고 있다. 좌우가 대칭되지 않은 균형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한쪽 손을 턱에 대거나 허리를 굽히거나 한쪽 다리를 땅에 대거나 한쪽다리만 가부좌를 취하거나 해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생각한다는 것은 명상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명상을 취할 때 우리는 좌우대칭이 완벽한 곧은 자세를 취하지만 생각할 때는 불균형의 자세에서 균형을 잡기위한 노력의 자세를 취한다. 생각한다는 말은 이상적인 세상에서 맞이하는 평화가 아니라 이상과 현실사이 그 불균형 속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고자 하는 노력인 것이다.

 

 나는 이리저리 조각상을 둘러보면서 조각상의 눈을 보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조각가라면 눈을 새기는 것이 가장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두려웠을 것이다. 대부분의 조각상의 눈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처럼 보이는 선이 눈에 그려져 있지만 그것은 눈동자가 아닌 그저 눈 이였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손처럼 거기엔 눈동자가 없는 영혼이 빠져 나간 눈만 있을 뿐이다. 눈은 영혼의 창이라 말할 때 그때 눈은 눈동자를 말함이라. 조각상에 눈동자가 없는 건 영혼이 드나드는 창이 없다는 것. 조각가는 창을 완전히 봉해버린 것이다. 조각상이 당신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약 조각상이 당신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돌이 될 것이다. 조각상의 눈은 아니 눈동자는 메두사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조각상을 보고 있는데 조각상의 눈에 눈동자가 나타나 당신을 쳐다본다고 하자.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것은 바로 죽음이 당신을 노려보는 기분일 것이다. 살아있는 당신과 죽어있는(삶이 봉인되어 있는)조각상 그 사이 건널 수 없는 강위로 시선에 의해 다리가 놓이는 순간이다. 눈 위에 새겨진 눈동자는 당신을 집어 삼키고 당신을 대신한다. 해골의 텅 빈 눈처럼... 아무것도 없는 눈 안에 눈동자가 나타나고 당신을 쳐다본다.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당신은 시선에 의해서 혼이 빠져나가고 당신은 육체의 껍데기만이 남은 채 조각상을 대신해 거기 서 있는다. 이제 당신의 눈에 눈동자가 없다. 조각상은 살아있는 당신이 되어 전시실 밖으로 나가 당신의 삶을 산다. 그리고 당신은 조각상을 대신해 전시실 안에 있게 된다. 이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다리로 영혼이 건너간 것이다. 조각가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을까. 그들은 자신이 창조해낸 조각상이 자신의 생명을 가로채 살아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항상 눈을 만들되 눈동자는 새기지 않은 것이 아닐까. 나는 생각해 본다.

 

<생각하는 사람> 말고도 기억에 남는 조각상이 있다. <입맞춤>과 <영원한 우상>. 그리고 <까미유 클로델의 두상>이다. <입맞춤>은 연인이 서로 끌어안고 입맞춤을 나누는 테마와 전체적인 형상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리고 <영원한 우상>에서는 무릎을 꿇고 손을 뒤로 한 채 자신의 품에 얼굴을 대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사실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남자 앞 어딘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저 텅 빈 시선이다. 조각상은 눈동자가 없기에 바라볼 수 없다. 어딘가 바라보는 듯 하지만 바라볼 수 없다. 그것은 눈동자 없는 텅 빈 눈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것, 바라볼 수 있는 자는 조각상을 보고 있는 나이다. 나는 그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생각하고 바라보길 원하지만 그녀는 나의 욕망을 좌절시킨다. 그녀의 얼굴은 하얀 벽이다. 그녀의 텅 빈 눈과 입술은 그녀의 얼굴로부터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려는 나의 노력마저 좌절시킨다. 그녀의 얼굴은 나의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내가 그녀의 얼굴이란 하얀 벽에 가로 막혀 좌절했던 것이다. <까미유 클로델의 두상> 세 점 중 석고상이 무척 인상 적이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하얀 벽처럼 다가왔다. 텅 빈 눈과 다문 입, 얼굴에 새겨진 가는 선들. 무표정함속에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얼굴. 로댕의 제자이자 비극적인 연인이었던 까미유 클로델은 시간이 만들어 낸 고통스런 인생사를 텅 빈 자신의 얼굴 속에 영원히 봉해버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누구에게도 얘기해주지 않으려는 듯 눈을 비우고 입술을 굳게 닫아 스스로 영원이란 비밀이 되어 버렸다.

 

예술가는 삶과 죽음 그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죽음에의 유혹에 시달린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무척이나 나약한 존재이다. 삶에 선 인간들은 그들을 붙잡아 주어야 한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나라로 가지 않게끔. 언제나 그 사이를 지키고 있게끔. 그리고 한편으로 예술가는 신곡에서 단테를 안내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비슷하다. 그들은 삶의 풍요 속에서 죽음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오만한 자들에게 죽음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준다. 아니 시간이 만들어낸 환영을 영원의 조각으로 깨부수게 해준다. 베르길리우스가 살아있는 단테에게 죽음의 세계를 둘러보게 해주듯 로댕은 살아있는 당신을 그곳으로 안내한다. 조각을 둘러보고 전시회를 나왔을 때는 베아트리아체를 마주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