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연

<시카고> 대형공연에 대한 새로운 감상법

새로운 감상법이라 뭔가 제목은 거창하지만.

시카고를 보며 느낀 점들을 서술해 본다.







1. 뮤지컬과 관객은 같은 꿈을 꿀까?


지난주 국립극장에서 시카고를 보고 대형 뮤지컬 공연의 한계 혹은 딜레마 같은 게 느껴졌다. 우선 극장의 시설에 따라 배우들의 대사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연출자가 공연에서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하려는 목적과 수단. 관객들이 공연을 통해 감동을 받으러 오는 목적과 수단은 분명 상충된다. 이 말은 결국 둘 다 감동을 찾지만 감동을 전달하는 방식을 연출자는 테크닉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화려한 조명과 음악 그리고 퍼포먼스. 배우들의 의상과 적합한 세트구성이 바로 연출자가 쥐고 있는 키다. 하지만 보통의 관객들은 시청각적인 것이 아니고 배우의 내면을 통해 감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배우의 손짓 발짓과 노래. 즉 감정 표현에 대한 것을 말한다. 무대 비주얼과 청각은 일종의 수단일 뿐이다. 결국 연출자는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는 인간의 감정을 움직여야 하는데 그 수단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즉. 대형뮤지컬. 소극장공연. 영화. 오페라. 음악회. 등 각자의 포맷에 맞는 감상법이 따로 있는 것이다. 영화를 감상하듯 뮤지컬을 보면 안 된다. 기능적인 면에서 영화가 주는 장면의 디테일. 리얼리즘. 관음성. 정보 전달의 친절함. 장르성. 배우 친밀도등을 통해 수동적인 감상이 가능한 어떤 것 이라면 뮤지컬은 무엇보다 능동적이어야 비싼 티켓 값을 아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능동적이어야 할까.

   




2. 스토리는 에피타이져?


난 무대공연 창작자의 입장이 안 되어 잘 모르겠다만. 아마도 지금까지의 대형 뮤지컬을 보건데 연출자들의 의도가 확실한 건 적어도 스토리 전달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즉 배우들의 감정 전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쇼를 보여주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대사 템포를 빨리 가야 하는 점이다.

거대한 무대와 2층 혹은 3층에서 바라보는 관객들은 배우의 표정을 볼 수 없다. 시력이 조금 안 좋다면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입을 벌렸는지 닫았는지 알 수 없기에 상식적으로 배우들의 감정 연기를 통한 스토리 전달은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이 배우들의 대사와 동작 퍼포먼스 음악 등에 신중을 기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어야한다.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스토리가 없이 아무리 비주얼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한 들 10분 지나면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스터고 라는 망작을 남기신 김용화 감독이 언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다면 단순한 정보 전달이라도 돼야 할 터인데. 무대 위의 배우들은 쉴 틈 없이 대사를 주고받는다. A의 입장이 전개되고 그 상황을 관객이 받아들이기도 전에 B의 대사가 연이어 시작된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데 마치 한 사람이 말하는 하나의 호흡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의도된 연출로 보인다. 그 쪽 연출자들의 사정이야 마를 주지 않고 속도전으로 관객의 집중을 유도하려는 이유인 것 같은데. 이런 환경에서 대사를 100%이해하고 감상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대형뮤지컬 뿐 아니라. 몇몇 소극장 공연에도 해당된다. 말을 빨리하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르겟다. 감정전달도 정보전달도 둘다 다 놓치게 되는데 .... 마침 대세 윤제문이 출연한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아주 좋은 예도 더러 있지만 말이다. (피리부는 사나이의 경우 실로 실소를 금치 못할 막장 스토리지만 배우들의 열연으로 막장을 예술로 승화시켜 버렸다. 특히 어딘지 모호한 엔딩장면 때문에 그간의 막장이 단순히 웃고 넘길 것만이 아님을...알게 해주는... 여튼 피리부는 사나이에 대해선 다음에 정리를...할까말까....)  

 

이것은 아마도 뮤지컬의 진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1900년 초기의 영화와 2013년의 영화를 한번 비교해보자. 영화는 산업 안에서 무궁무진한 발전을 해왔고 배우들의 연기나 영화의 연출방식이 무성영화에서 토키영화로의 진화. 그리고 필름과 디지털의 그리고 2D에서 3D로의 진화 과정에서 분명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상매체로서의 예술성을 유지하면서 자본의 영향이 대중의 입맛을 바꾸기도 했고 대중이 자본을 움직이기도 했다. 이것은 쌍방향의 가치 예술이었고 결국 음악과 함께 대중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하지만 무대공연은 고전적인 틀에서 감히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공연예술의 경우 계속 언급되는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비싼 티켓 값을 치루며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것인지 쇼를 보러 가는 것인지 말이다. 왜냐면 이야기와 쇼를 둘 다 취하기엔 제반 여건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2시간짜리 쇼에서는 감동을 느끼기 어렵다.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갑자기 생각났는데 예전에 임창정이 출연해 유명했던 <빨래>라는 뮤지컬이 이야기와 쇼를 동시에 취한 듯하다.)

 




3. 읽어라 그리고 쇼는 즐겨라.


이와 같은 생각들은 분명 내가 너무 영화에 치중한 감상법이 체내 화 돼 있어 그랬는지 모른다. 의미를 이미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버릇이 공연예술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허나 어렸을 때부터 디즈니만화를 사랑해 왔고 고전 뮤지컬 영화 뿐 아니라. 근작인 TV영화 하이스쿨 뮤지컬까지. 나의 뮤지컬에 대한 애정은 영화장르 안에서도 남달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연무대는 달랐다. 여기서는 감상의 기준을 이미지와 청각으로 가면 안 된다. 우선 대사를 읽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 ‘듣는다‘가 아니다. 읽어야 한다. 배우와 함께 말이다. 배우가 말하는 것을 듣는 다는 것은 수동적이 될 소산이 크다. 불가능 할 수도 있다. 결국 능동적인 감상으로 이어지려면 배우들이 하는 말을 같이 ’읽어야‘ 한다. 그럴 때 야만이 무대 연출자들 보다 한발자국 앞서나가는 것이고 관객으로서 무대를 장악할 수 있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리고 쇼를 즐겨라.



4. 시카고 단평.


그럼 이글을 쓰게 만든 문제의 시카고를 들여다보자.    


아는 사람은 인순이와 음악감독인 박칼린 밖에 없었다. (공연 감상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 전문 배우들을 잘 모른다.) 때문에 적어도 내겐 인순이가 무대의 당락을 좌지우지 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견해로 평소 무대공연을 자주 보지 못하는 까닭에 무지의 소산일 경우가 크다. 하지만 근 5개월간 일주일에 1편 이상 소극장 및 대형 뮤지컬을 감상하던 터라 어느 정도 객관성을 확보했다고 자분한다.


그 틀 안에서 말하자면 인순이의 경우 포스터에서는 검은 머리에 숏 컷 가발을 썼는데 무대에선 인순이 트레이드인 하얀색 파마머리를 했다는 점이 걸렸다. 포스터를 보고 공연을 보러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일종의 약속위반이다. (영화 예고편에 나오지도 않은 장면을 넣진 않는다.) 또한 대중들이 시카고를 사전에 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화밖에 없다는 점에서 영화 시카고를 통해 익숙해진 캐서린 제타 존스 역을 50대의 인순이가 소화했다는 건  놀랍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요계 대 선배님의 연배가 느껴지는 무대였다. 곳곳에 힘겨워 하시는 호흡과 무겁게 느껴지는 팔다리 그 힘겨움을 바라봐야만 하는 안타까움은 후배 연기자들의 날렵한 동작 앞에 더욱 대비되기 시작했으며...


그녀가 가진 수많은 사연들과 방송을 통해 보여준 다양한 모습들이 중첩되면서 뉴욕에서 건너온 시카고와 한국의 인순이의 이종교배에 실패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벨마 켈리는 농염해야 한다. 연배가 있어도 섹시함을 잊어선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의상은 그렇다 한들 멀리서도 느껴지는 인순이의 나이는 가슴이 저몄다. 아무리 대 선배고 2000년대 초부터 시카고와 함께해온 사이라지만 10년이 넘었는데 작품을 위해 고심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대형 뮤지컬의 주연을 맡는 다는 건 국가대표만큼 진입 장벽이 높은 게 사실이다. 박지성도 너무 아쉽지만 후배들을 위해 세대교체와 한국축구의 발전을 위해 알아서 떠나지 않았던가. 그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아래의 사진은 2010년 즘으로 사료된다.



첨언 하자면, 조연 중 두성인지 가성인지로 소릴 내던 배우는 정말 대사의 80%를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가는귀가 먹은 줄 알았지만 아마도 사운드 시설의 미약함과 함께 간 친구들 역시 동일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미루어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젊은 남자 배우들 중에서도 혀가 짧은 배우가 있었으며. 어떤 배우는 발성이 작은 탓인지 음악을 너무 크게 틀은 탓인지 목소리가 묻혀서 들리지가 않았다. 물론 스토리 전개 대사는 아니어서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렇듯 몇몇 배우들의 개인적인 기량을 뺀다면. 무대자체는 굉장히 훌륭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군무를 담당한 조연급 연기자들의 호흡이 남달랐다. 엄청난 노력과 땀이 돋보이는 순간이 매번 이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싶은 충동이 일정도 였으니까... 특히 법정 무대에서의 상황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적도 상상해 본적도 없는 퍼포먼스여서 과연 1900년대 중반 브로드웨이에서로 이런 식의 연출을 했는지 궁금할 정도 였다.


마지막으로 벨마와 록시의 라스트 씬은 정말. 너무 아쉬웠다. 난 의례 뮤지컬에서 보여주는 초절정의 스펙터클 쇼를 원했던가 보다. 두 분의 투맨쇼가 끝난 뒤 뭔가가 더 있어야 했을 것 같은데...물론 시카고 스토리 자체가 그러하기에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시카고는 훌륭한 무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역시 완벽할 수는 없다. 이 점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조금만 더 대중 친화적인 연출로 나날이 발전해 나가는 시카고 팀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