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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우리가 영화를 사랑하는 법

 

François Truffaut 프랑소와 트뤼포(감독,배우,각본,평론가)1932년 2월 6일 ~ 1984년 10월 21일


  블로그를 시작하고. 영화를 보고 글로 쓸 때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것을 다시 글로 정리한다는 것은 영화를 보며 문득 스쳤던 정서들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 안에서 조금도 기호화 될 수 없는 지점을 어떻게든 끌어내어 의미를 부여하여 합리화 시키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난 이러한 작업들이 오히려 영화를 더럽히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글을 쓴다는 것인데..... 

잠깐.....

 

  트뤼포가 그렇게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식을 말했다고 해서 그게 진리로 아직까지 받아 들여져야 할까? 시대가 지나면 이제 그러한 영화사랑 감상법 역시 변해야 하지 않을까. 언제까지 누군가의 말을 바이블처럼 믿으며 살아가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트뤼포는 마치 예수와 같이 불현 듯 어느 날 몇몇의 동료들과 새로운 계명을 들고 나타났다.(뉴웨이브라는 불리는)그리고 우린 그 계명을 따른다. 그 3가지 방법. 그것을 두 번보고, 그것에 대해 쓰고, 그것을 찍는다는 그것!


  예수의 계명과 다른 것은 그나마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이것은 계명이 아니니 불이행 한다 해도 우린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린 그것을 스스로 계명으로 만들어 버렸다. 문득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 마치 진리로서 쓰인 것이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걸까?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 변방의 평론가들이? 아니면 그가 시네필의 대부로서 거절 할 수 없는 제안을 우리에게 던진 것일까? 우린 그 사랑법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파탄한 시네필 마냥 반역자가 된 듯 죄책감에 시달리곤 한다. 지금의 내가 글을 쓰는 아주 작은 무의식은 바로 이 계명을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때문이리라. 그것은 물론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각자 연애하는 방식이 다르듯 영화에 대한 사랑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트뤼포가 말한 3가지는 트뤼포식 사랑법이다. 그대로 이행한다는 것은 십계명을 지키거나 예수의 새로운 계명, "네 이웃을 사랑하라 라" 를 지키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하긴 지키기 어려워야 계명같긴 하겠다만..난 그런 사랑법이라는 말이 마치 인터넷 에 널린 그 많은 연애 지침서와 다를 바가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의 방식은 타당한 구석 이 없지 않아있다. 그리고 이미 몸이 당연하다는 듯 반응한다...

 

영화가 영화로서 읽힌다면......그것이 너무 좋아서 영화에 경배를 올리고 싶다면 바로 행동으로 보이면 될 것이다. 아니면 영화를 외워 버리던지 그래서 아예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매체가 없거나 매체 앞에 자신이 없거나 결정적으로 영화가 없더라도 언제든 머릿속에서 꺼내어 볼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던지, 감독이라면 자신이 만들 영화에 동일한 지점으로 같은 말을 하거나 반대로 다른 말을 하거나 결정하면 된다. 영화와의 일체감...사랑한다고 영화와 섹스를 할 수 없다. 영화는 만질 수 없다. 말 그대로 그림의 떡. 오로지 시청각적 제시....그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몸으로 그를 기억해 주는 것 뿐....몸이 스크린에 투영된 사람들의 삶을 기억한다면 의식하지 않아도 그렇게 몸이 움직인다. 사실 내가 위에서 말한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은 정확히 말해 의식하지 않는 행위일 뿐이다. 


이해하기 힘든가? 난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 영화를 엔터테인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며 본다면 할 말이 없다. 그들의 선택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게끔 만드는 영화인들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 난 아직도 해운대가 천만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고 김기덕의 영화가 유독 국내에서 천대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변화... 영화를 본뒤 삶의 변화가 없다면 영화를 본다는 씨네필 역시 골방에 박힌 오타구 밖에 안된다. 그렇다 내가 말한 삶의 변화는 행위를 말한다. 


 쓴다는 행위, 온갖 미사여구와 방대한 컨텍스트들. 스크롤의 압박. 이름도 모르는 제3세계 영화들, 드레그엔 드랍. 수천가지의 영화 그 목록의 특별한 사명감. 다운엔 딜리트의 반복, 영화제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빡빡한 스케줄 그 의무감. 먼저보고 많이 봐야한다는 강박증, 내가 본 영화를 보지 않은 자들에 대한 멸시. 영화안에서 계급을 나누려는 노력. 스스로 특별하고 독특한 감상자라 여김. 그런 자랑거리 혹은 자기만족, 가끔 타인을 인정해주는 옹졸한 배려, 좋은 영화는 들뜬 웃음으로 숨기려는 제스춰. 가면을 써야먄 당당해지는 악플러들, 부정하는 자를 적대시 하는 방어기제, 영화로 세상을 보지만 현실과 단절된 삶. 영화가 인생이라며 인생이 영화인줄 착각하는 거대한 자기 합리화(꿈에서 깨길) 영화에 관한 글은 대부분 영화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며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며 어떤 때는 의도와는 별개로 완전히 다른 영화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이미지가 망막에 닿는 순간 이미 우리가 전에 읽었던 활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다. 마법의 순간.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극장의 불이 켜지면 우린 다시 생각을 글로 정리한다. 지금 내 마음 속에 이글거리는 감정을 활자로 풀어내야 한다. 정리한다. 감정을 다스린다. 비문명 시대부터 내려오는 인간이 사물을 기억하기위한 행위. 일종의 주술, 이제 교회에서 마무리 주기도문을 외우는 시간이다. 


생각해 보자. 영화는 글로 시작한다는 것을. 수많은 활자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나열 돼 있고 이것은 카메라에 담길 완벽한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이미지는 즉 영화는 우리에게 절대 글를 읽으며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제공해준다. 우린 왜 완벽해진 영화를 다시 불완전한 기호로 나열하려는 것인가? 과연 영화 이상의 것을 글이 표현한다고 생각하는가?  타르코프스키 그 유명한 촛불시퀀스 이것을 문자로 표현하고 싶은가? 아니 그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왜 어설프게 글을 써서 이미지를 회손시키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체험하라는 말이다.



그래도 써야만 하는 상황

 인간의 사랑은 혹은 인간이 하는 행위들은 그 위에 신적 존재에 대한 대입이 가능하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여 성별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인간은 창조주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있다. 죄를 지을 수 있다. 그 자유의지...그렇다면 영화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그리고 현제의 2010년 영화는 진화하고 있다. 인간이 진화하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창조주의 진화. 신을 닮아가려는 행위는 새로운 바벨탑이 될 것인가 혹은 창조적 영화가 될것인가. 아담이 신의 손에 만들어져 가장 처음 했던 행위, 사물에 이름 짖기.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 같은 말 창세기-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1:3)",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그렇지 않았을때의 결과. 시인 김춘수가 한 말-"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모든 것이 대상을 사랑하기 위한 행위이다. 


 영화에 대한 글쓰기란...인간이 영화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쉽게 말해 '연애편지'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만으로 써지는 것. 물론 그 연애편지가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진 않는다. 하지만 작은 행위의 중요성..... 깊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데카르트가 말했듯 "Gogito ergo sum"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생각하는 것 즉 생각한다는 건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인 것이다. 인간이 그런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관객이 감독이라면 영화를 찍으면 된다. 이것은 원인이 분명한 행위이고 영화에 대한 올바른 보답이다. 하지만 모두가 감독이 될 수는 없다....그럼 남는 것은 모두가 다 글을 쓰는 것이다. 140개로 트윗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행위의 인정. 영화가 주는 감정을 더욱 확장 시키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남은 한가지, 삶의 변화. 선택이 아니라 양심이다. 영화는 체험이고 경험이다. 우리의 삶은 변화해야한다. 곧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