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Film

사냥꾼의 밤 (The Night Of The Hunter.1955) 찰스로튼의 처음이자 마지막 걸작

 찰스로튼(1899.7.1~1962.12.15)


 배우 찰스로튼. 단 한 편의 영화가 이렇게 놀라울 수 있을까? 이 것은 그의 감독 데뷔작이다. 그는 이 영화를 찍고 배우로 다시 돌아갔다. 내 영화가 이정도면 됐다고 만족했기 때문일까?...영화를 찍어보면 안다. 이것은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 존재의 이유가 되어 버리는 행위. 그는 분명 또 찍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흥행에 실패, 평단의 가혹한 혹평 그에따른 스튜디오의 냉혹함이 그의 기회를 박탈 시켰다....이 단 한편의 기이한 영화. 사후에 재조명을 받게된 독특한 영화 바로사냥꾼의 밤....

 


 영화는 거짓예언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며 시작한다. 하늘엔 별이 떠있고 신기루 처럼 나타난 쿠퍼할머니...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얼굴 하지만 그녀를 조금만 살펴보면 왜 로튼이 그녀의 목소리로 영화를 시작하려 했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릴리안 거쉬. 과거 무성영화시절 그리피스와 함께 호흠을 맞추며 가장 위대한 배우로 칭송받던 그녀. 이 독백은 그만큼 당시의 관객에게 신뢰를 주며 곧 그녀가 언제 등잘하게 될지 기대하게 만든다. (감독은 그것을 염두해 두엇는지 3막시작 부분에서 뒤늦게 그녀를 투입시켜버린다.)


<국가의 탄생> ,<인톨러런스>로 세계적 배우가 된 릴리언거쉬. 

스튜디오 스타시스템의 시초이기도 함


릴리언 거쉬(쿠퍼)의 독백이 끝난 후 곧장 죽어있는 여인의 다리와 살해를 저지른 헤리(로버트 미첨)가 등장한다. 힐끔힐끔 하늘을 쳐다보면서 너무나 여유롭게 신과 대화하는 헤리의 모습은 방금 여자를 죽여 놓고도 무척 태연한척 다음 대상이 누구인지 신에게 물어본다. 얼핏 신께 대항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보이지만 계속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헤리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것은 대항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신의 뜻에 의해 행해지는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며 결국 이 사람은 일종의 싸이코패스처럼 다가온다. 그렇다. 현대에 와서야 재조명 받고있는 사이코패스라는 캐릭터. 이 영화는 1955년 영화인데. 우린 이미 아주 오래전 로버트 미첨과 찰스로튼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로버트 미첨의 전성기 시절


노년의 로버트 미첨


  우린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로버트 미첨의 연기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의 무덤덤한 표정, 음흉함, 히스테릭하고 집요하고 어색한 동작. 때론 빠져들 듯 강렬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는 기준을 어디에 세워야 할지 의문 투성으로 바라보게 하다가 어느 순간엔 웃음마져 자아내게 한다. 말그대로 무아지경. 판단 불가능의 영역. 

 
 
곰이 생각해 본다면 본업이 배우인 찰스로튼의 야심이 담겨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배우로서의 영화가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았다면 철저히 연기 디렉팅에 실패 했거나 둘 중의 하나가 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연기를 유심히 살펴본다면 과장된 표정과 동작들이 단순히 디렉팅의 차이에서 오는 것은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그렇다고 성공적이라고도 볼 수 없다. 왜냐면 이 놀랄만한 연기, 로버트 미첨의 지독한 새로움은 일차적으로 강한 거부감을 낳기 때문이다. 이런 거부감은 단순히 어디서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온 것인데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게 되면 그 어색함은 익숙해져 버린다. 정확히 말해 어느 순간 상쇄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빈자리엔 완벽한 새로움과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봐온 영화들 중에선) 실질적인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 배우의 연기적인 욕구가 자리하고 있게 된다.



종교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작은악마


 또한 영화 속의 캐릭터는 더 이상 신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욕망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이야기는 단지 헤리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베이스 건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영화 속의 헤리 역시 신의 태도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냥 버릇처럼 상황이 닥치면 찾는 것이다. 나일론 신자들이 항상 힘들어 죽을 때만 하나님을 찾듯이 말이다. 심지어는 헤리포웰이 존의 어머니와 동침을 하게 될 때에는 불현 듯 남자의 욕구마저 없어져 버린 무성에 가까운 상태로 전진한다. 이후 포웰의 목적을 알아차린 그녀는 저항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바로 여기 그녀를 죽이기 직전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기지개를 펴듯이 손을 하늘위로 올리는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표현주의 적인 율동과 함께 전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덤덤하게 칼을 집어 든다. 바로 그 순간이 영화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일관된 감정이 사라져 버린 정말 고깃덩어리의 인간이 남는 것이다. 즉 이때 우린 감정이 없는 하나의 괴물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마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과 같은 느낌

  헤리포웰이라는 동물적 인간 그가 벌이는 행동들에 대한 원인 그 목적은 무엇일까?  혹시 돈일까? 그가 자신의 죄의식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종교를 끌어들여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받아 들인다. 한번 목표로 잡은 것에 대한 맹목적인 집요함. 감독은 그의 외상에 대한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 한번도 헤리의 입에서 사연이라던지 이해를 요하는 타당한 대사나 행동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성을 잃은 자. 혹은 살아있는 시체. 해리포웰!!
 

말보다..직접 보시라..


존의 어머니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어머니를 연기한 쉘리 윈터스는 육감적인 몸매와 발랄하고 건강한 이미지로 전후 미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특히 말론 브란도 클라크 게이블 버트 랭카스터 등 당대의 미남 스타들과 염문을 뿌리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체적인 그런 틀 가운데 몇몇 의문스러운 연기가 있는데 감옥에서 나와 스푼가게에서 사람들에게 증오(HATE)와 사랑(LOVE)이 적힌 손으로 진지하게 사랑이 이긴다며 종교적 신념을 강조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지하 창고에서 빠져나올 때와 강가에서 진흙에 미끄러지는 슬레습틱한 장면을 연출할때....조금은 과장되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것들을 의도했다면 그것은 마치 어렸을 적 동생들을 놀릴 때 하던 짓이랑 비슷해 보인다. 그러니까 헤리포웰이 행동하는 목적은 돈때문이 아니라.(돈에서 시작했지만) 추적 자체를 살인 자체를 즐기는 것이 분명해 진다. 그저 아이들이랑 계속 놀고 싶은 것뿐이다. 26명의 여성을 살해한 사이코패스. 이유가 불분명한 행위. 심지어는 할머니에게 총을 맞았을 때도 아이처럼 방방 뛰면서 도망가는 장면을 연출해 내는데...  이 묘한 매력은....

뭘까?........물론 이 연기에 대한 부분은 영화를 보는 누구나 납득을 시키기엔 힘든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때문에 당시에 흥행에 참패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백번 양보해도 진흙탕에서 넘어지는 장면들은 감독의 실수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딱히 설득할 말도 없다....

꾀 독특했던 장면을 함께보자..(전체화면으로 보길 권장한다.)




 
인상적인 장면들

이 영화에선 밀회만큼은 아니지만 분명 영화적으로 짜릿한 순간이 있기도 하다. 펄이 인형 속에 들어있던 돈을 꺼내 가위로 자신들의 모습을 오려낸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오려진 종이(돈)인형에 클로즈업이 들어가고 펄이 손가락으로 누가 누구인지 짚어주기 까지 한다. 인간의 심리, 어렵고 힘들 때 부모님의 생각을 먼저한다는 것. 하지만 그녀는 엄마를 오린 것도 아빠를 오린 것도 아니다. 즉 부모의 존재가 없어져 버린다. 무의식중에 더 이상 부모가 도움이 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둘이서 이 사건을 풀어 나갈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한다. 

우선보자....(전체화면으로 보길 권장한다.)



이어 그들의 등 뒤로 헤리가 등장을 하고 당혹스런 서스펜스가 조장된다. 과연 펄이 들고 있는 인형의 뱃속에 그가 찾던 돈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안 들키게 될까.... 여기서 당혹스럽다고 말한 것은 실제적으로 뒤에서 그러니까 헤리의 시점에서 뻔히 돈 줍는 모습이 모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이들은 돈을 인형속에 다시 구겨 넣고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일어선다. 그리고 헤리에게 들어가는 트랙인. 카메라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반대편에 돈으로 오렸던 존과 펄의 종이모양이 날라 오고 곧이어 아이들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말하기 부끄럽지만 ’오 말도 안 돼’라고 작게 소리쳤다. 단순한 컷의 결합인데 순간 짜릿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어설픈 서스펜스와 진짜배기 서스펜스의 결합. 난 순간 깜짝 놀랐다. 허술한 인물 배치가 나중에 나올 이 장면 때문에 계산된 것임을 말이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잘려진 돈 조각은 그의 다리를 지나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내리면서 그의 표정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우린 아이의 표정에 집중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때 존은 헤리에 의해 멈추게 되고 카메라는 존의 표정을 잡는다. 너무나도 어색하게 웃는 존의 얼굴이 또다시 상황에 대한 괴리감을 낳게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묘한 접점. 그리고 왠지 바람에 날려 그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듯이 아이들은 스스로 위험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희망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는 대부분 세트에서 촬영을 함으로 독특한 이미지를 구축한다. 강물에 비치는 달빛 이라든지. 어두운 밤 지평선 너머에서 올라오는 빛이라든지. 오로지 세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들이 많았다. 특히 펄의 노래 소리와 함께 천천히 너무나 고독하게 흘러가는 배의 모습, 강물은 달빛에 출렁이고 숲의 동물들이 그들을 지켜주는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 보는 나조차도 마음이 편해지기까지 한다. 

음악...

 음악이 또한 중요한 요소로써 쓰인다. 특히 헤리가 부르는 노래인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노래인데 찬송가가 악당의 입에서 불리기 시작하면서 그 멜로디는 악마의 진혼곡과 같이 바뀌게 된다. 헤리는 자신의 등장을 선교사인양 보이려고 하지만 정작 도망 다니는 존이나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 찬송가에서 느껴지는 떨리는 감정을 감출 수 없다. 이 찬송가는 본래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졌고 실제로 어린이 찬송가에 수록이 되었던 곡이기 때문이다. 즉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이 예배를 드릴 때 즐겨 부르는 곡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영화의 초반부, 재판받는 장면이 등잘 할 때에 판사의 뒤로 링컨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영화 시대배경이 1861에서 65년임이 분명한데 헤리가 부르는 찬송은 만들어지고 처음 대중에게 공개된 때가 1887년이다. 실제로 링컨 재임 때 기독교인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사적 고증에 대한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의도된 것이라고 판단을 한다면 그 노래를 처음 부른 자는 결국 해리가 된다. 그 노래는 살인자의 노래이다. 사이코패스, 아직까지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입에서 불러지는 찬송가가 살인자의 입에서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

 그리고 한 가지 이 영화가 섬뜩한 점은 어머니의 부재이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함구하고 돈을 지켜내려고 한다. 맹세를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어머니에게 의지하거나 혹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아이들은 어머니에 대한 관심이 없다. 힘들어도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찾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멀리 도망갔다고 거짓말 하는 헤리에게 의문의 한 마디 조차 던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엄마는 아이들을 진짜 자신의 자식처럼 대하지 않는다. 왜일까. 오히려 나중에 만나게 되는 쿠퍼양이 어머니의 존재감으로 다가온다. 이런식으로 미국 사회에 또 다른 열린 가족이 탄생한다.

 자식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 아버지, 사이코패스 해리에게 정신이 팔려 아이들은 나몰라라하는 어머니, 그들의 아이들은 더러운 돈을 감추고 도망다니다 구원자 쿠퍼를 만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눈 오는 크리스마스에서는 부모의 저주가 풀리지 않아서 였는지 선물 꾸러미와 행복한 분위기를 만들어 아이들의 새로운 시작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생각해보면 두 분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해 감정적인 완결성을 두기엔 무리가 있다. 남편은 강도짓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아내는 거짓 선교사와 바람이 나버려 그 바람난 남자에게 살해를 당한다. 어쩌면 그런 사건들이 어린 아이들 한태는 기억하기 싫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쿠퍼양은 마지막 순간 아이들이 잘 이겨 낼 것이라고 독백을 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전한 그늘. 강인한 어머니 그리고 그가 믿는 신의 영역이라는 강한 테두리로 영화를 완결짓는다.
 찰스로튼의 사냥꾼의 밤은 시적이고 우울하고 몽환적이며 때론 유머스럽고 긴장이 넘치기도 하며 마지막 순간 신비로운 메시지를 던지며 끝나는 영화이다. 로튼은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아이들의 역경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
...........아주 새로운 방법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