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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대부2 (Godfather : Part2 1974) 시대의 변화가 시대의 부정으로 이어질 때

              




얼마
전 다시 개봉한 대부1을 보고 글을 썼다...



하지만 이 글로 내 생각을 정리한다거나

영화에 대한 파편적 이미지들에 논리성을 부여한다거나 하는 노력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영화를 소개하려는 의도 역시 아니었다...

글은 내 만족이다...

하지만 다 쓰고 나서도 이 만족감이 날 체워주지 못하는 것은...

다시..

대부2에 대한 글을 써야 된다는 강박으로 작용했다...

대부에 대한 글의 완성은 대부2에 대한 글이 마무리지어져야지 비로서 끝날것 같았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시대의 변화가 시대의 부정으로 이어질 때.

 

 대부1과는 다르게 대부2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잘 정리되지 않았다. 생각이 산발적으로 흐트러져서 어떻게 이야기를 다시 구성해야할지, 사건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이글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비토 꼴레오네, 아버지의 이야기와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의 이야기,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대부1을 본 사람이 대부2를 이해함에 있어서 혼란을 느끼는 건 대부1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대부2를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1을 아버지와 아들 구도에서 해석하고 이해했다. 그래서 대부2역시 본능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이라는 구도로 이해하려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더욱 그런 것이 대부2는 이야기자체가 아버지(비토)와 아들(마이클) 두 개의 이야기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2는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그 순간 당신은 혼란스럽고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로 대변되는 비토, 마이클이라는 두 개의 항은 여기서 구도가 바뀐다. 왜냐면 마이클의 아들 안소니라는 항이 더 추가되기 때문이다. 비토와 안소니 사이에서 마이클은 고민한다. 자신이 거부하려했던 아버지(비토)라는 자리 하지만 안소니를 아들의 자리에 놓기 위해 마이클은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를 부정한 자가 아버지가 되려할 때 그것은 곧 한 아버지아래 태어난 형제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된다.

 

 간단히 말해 대부1이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대부2는 형제에 관한 이야기다. 좀 더 자세히 말해 같은 피를 나눈 형제(마이클이 프레도를...)를 죽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를 부정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부정한다는 것은 없는 걸로 만드는 것이고 이 말은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인간이 사회적동물이고 사회제도를 통해 다수의 합의하에 없는 걸로 한다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다고 말하는 건 더 나아가 그 말을 하는 자, 자신의 존재이유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 말을 하는 자 자신이 아버지의 자리에 놓일 때 그는 두 가지 선택에 놓인다. 아버지가 된 자신을 부정하거나 혹은 자신의 아들을 부정하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긍정하거나 첫 번째는 사실상 자살행위를 뜻한다. 마이클은 두 번째를 선택한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를 긍정함은 이미 부정을 바탕에 둔 긍정이기에 자신의 형제, 어머니의 부정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텅 빈 가족 혼자 남은 아버지. 그때의 아버지는 그저 공허 할뿐이다.

 

                                               마이클 꼴레오네(알파치노) - 비토 꼴레오네(로버트 드니로)


 대부1이 대부2보다 이야기를 따라가기 쉬웠던 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하나의 흐름 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하구도로 하나의 선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부2는 형제간의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남은 형제간의 이야기. 그것은 수평구도로 하나의 선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점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점은 여러 개의 선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해 하나로 모아 질수 없는 여러 개의 선을 의미한다. 대부1과 대부2사이에는 아버지시대와 아들시대의 변화만큼이나 큰 단절이 존재한다. 이미 대부2는 첫 장면 타이틀 시컨스부터 이 영화를 대부1과는 다르게 봐달라고 애기한다. 이것은 분명 대부1을 본 사람에 대한 일정의 경고와도 같다. 대부1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비토(말론 브란도)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이 비토에서 마이클로 옮겨간 다음에도 이야기를 성립시키고 마이클의 행동을 이끌어가는 건 아버지 비토라는 존재이다. 아니 차라리 돈 꼴레오네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대부2는 바로 이 돈 꼴레오네라는 이름에 대한 탐구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이클이 돈 꼴레오네라고 불리는 장면 다음에 마이클이 화면에서 빠지면 돈 꼴레오네의 빈자리가 보여 진다. 말 그대로 비어진 돈 꼴레오네, 사라진 이름 돈 꼴레오네...우리는 대부2에서 그 이름을 들을 수 없다. 마이클은 사람들로부터 마이클 꼴레오네라고 불릴 뿐 돈 꼴레오네라고 불리지 않는다. 사라진 돈 꼴레오네의 자리 옆에 타이틀이 뜬다.

 

대부1을 이끌던 아버지의 자리가 사라지고 대부2는 이제 아버지가 사라진 곳에서 (돈 꼴레오네가 사라진 곳에서) 살아 가야하는(버텨야 하는) 그의 아들들(형제)들에 관해 이야기 할 것임을 예고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비토 꼴레오네 즉 마이클의 아버지의 어린 시절로 넘어간다. 나는 앞에서 이 영화는 수평구도로 여러 개의 흐름이 뒤섞인 이야기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 개의 중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중심을 마이클의 이야기와 비토의 이야기가 서로 전환되는 지점에 두고 싶다.

 

우리는 두 이야기가... 두 시간적 계기가 겹쳐지는 지점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해해 나갈 것이다. 타이틀이 뜨고 비토의 어린 시절로 이야기가 넘어 갔을 때 우리가 맞이하는 건 죽은 비토의 아버지 즉 마이클의 할아버지이다. 비토의 이야기 역시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던 형 역시 이 장례식행렬에서 총에 맞아죽는다. 비토의 어머니는 복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원수를 찾아가 비토만은 살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어머니마저 죽음을 당하고 비토는 고향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된다. 비토는 사실상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유의 땅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미국으로 건너오지만 천연두판정으로 입국이 거절된 채 앨리스 섬에 머문다. 그리고 창밖으로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서 있는 비토 옆으로 자막이 뜬다.


  <앨리스 섬 1901년 비토 꼴레오네>


어린 비토가 부르는  
이탈리아노래의 흥얼거림이 겹쳐지고
화면은 세례식을 받는 마이클의 아들 안소니 꼴레오네로 넘어간다. 



그리고 자막이 뜬다. <비토 콜레오네의 손자, 안소니 비토 꼴레오네, 네바다주 1958년>


이때 화면은 마이클의 아버지 비토와 마이클의 아들 안소니를 연결시키듯 보여준다. 마이클의 중심으로 한쪽은 (마이클에게)아버지이고 한쪽은(마이클에게)아들이다. 이 말은 비토를 닮은 건 마이클이 아니라 안소니임을 말해준다. 만약 대부2를 대부1처럼 아버지와 아들관계로 둔다면 그것은 비토와 마이클이 아니라 비토와 안소니일 것이다.


대부2는 이처럼 마이클의 중심으로 비토와 안소니가 만나고 있다. 흔히 이 영화의 두 줄기 비토의 이야기와 마이클의 이야기를 상승과 하강, 비토의 성공과 마이클의 몰락이라는 대비, 대조로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해해선 안 된다. 그 순간 우린 많은 걸 놓치게 되고 심지어 잘못 이해하게 될 것이다.
냉정히 말해 두 이야기는 대조될 수 없다. 그래서 상승과 하강, 성공과 몰락이라는 대조관계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절대적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이야기를 같은 충에 놓고 이해하려는 행위자체를 무효화시킨다. 다시 말해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층에 놓고 이해되어야한다. 그래서 그것은 대조가 아니라 변화로 읽혀야 한다. 돈 꼴레오네라는 하나의 흐름이 한번은 비토의 이야기로 한번은 마이클의 이야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돈 꼴레오네라는 하나의 흐름의 변화 혹은 몰락을 뜻한다.

 

비토에 의해 긍정되는 돈 꼴레오네가 마이클에 의해서 부정되기 때문이다. ‘1958년 네바다주 안소니 꼴레오네’ 자막과 함께 세례식을 받는 안소니의 시선으로 영화는 마이클이 현재 있는 공간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커다란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혼식이 아니다. 이것은 사업의 연장선이다. 마이클은 지금 여기서 기부금에 대한 상을 이 지역의원으로부터 받고 있다. 이 공간에서 가족 친지 즉 패밀리는 주변으로 밀려나 있고 악기연주자들은 이탈리아노래를 모른다. 결혼식이 패밀리를 모으는 것 이였다면 이 행사는 패밀리를 주변으로 몰아낸다.

 

실내에서 마이클은 비토가 행했던 의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사업을 얘기한다. 사업은 존경과 명예가 아닌 오직 이익과 손해만이 존재할 뿐이고 사업이 얘기되는 곳에선 이익과 손해의 계산법에 의해 그 중요도가 결정될 뿐이다. 대부2에선 이 ‘패밀리’라는 단어조차 사라지고 의미를 갖지 못한다. 대부1에선 ‘패밀리’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 단어가 주는 혼란함에 의해 비극이 벌어졌다면 대부2에선 ‘패밀리’라는 단어자체가 의미를 잃고 사라진 것이다. 그곳에는 패밀리의 사업이 아니라 오직 ‘사업(그들이 말하는 business), 패밀리의 이익이 아니라 오직 사업의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더 이상 패밀리는 그 단어처럼 의미를 잃었다. 그리고 행사는 밤까지 계속된다.

 

가족들은 밤이 되어서야 한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한다. 실외에서...실내에서 식사를 하던 가족들은 이제 실외에서 식사를 하고 실외와 실내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와 동시에 실내가 오히려 가족을 위협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그날 밤 마이클과 아내 케이의 침실을 위협하는 총알세례, 이상하게 낮 행사장면에서 이 장면까지의 씬의 구분이 모호하다. 행사는 밤이 되어도 계속되고 밤이라는 시간규정을 통해서 마이클과 케이의 사적인 공간까지 하나의 씬 으로 묶고 있다. 여기서 행사 즉 사업적 공간과 부부의 침실로 대면되는 가정, 사적 공간이 모호해져 감을 뜻한다. 그리고 총알세례가 자신의 사업과 관련되어있음을 알게 해준다 집은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가족이 자신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그날 밤 마이클은 아들 안소니와의 대화를 마지막으로 가족. 그리고 이집을 떠난다.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안다..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안소니의 말에 대답하는 마이클의 얼굴에서 화면은 유리창너머를 바라보는 비토에게로 옮겨간다. 그리고 자막이 뜬다

 

<뉴욕 비토 꼴레오네 1917년>



성인이 된 비토의 모습이다. 비토는 지금 유리창너머를 아련하게만 보이는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안소니가 마이클을 바라보듯 그리고 안소니가 마이클에게 했던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토는 그의 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이 지역 보스 돈 파누치를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질문을 던진다.

 

"왜 같은 이탈리아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지?"

 

그것은 마치 안소니가 마이클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보인다. 그리고 비토가 자신의 큰 아들 소니의 이름을 부르면서 화면은 다시 마이클에게로 넘어간다. 비토의 이야기에서 마이클의 이야기로 넘어갈 때 우리는 비토가 자신의 아들들 이름을 부르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비토라는 아버지에 의해 묶여있는 아들(들)사이의 끈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어떻게 끊겨져 가는 가를 마이클의 이야기를 통해보게 된다. 마이클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한다. 아버지 때부터 거래하던 하이만 로스와 현재 사업을 진행하지만 그 역시 믿지 못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조직의 일원 프랭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여전히 배신자를 찾고 있다. ‘친구를 가까이 두되 적은 더 가까이 두어라’ 마이클이 자신의 형 프레도 에게 이 말을 할 때 우린 불길함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마이클이 프레도를 자기 옆으로 부를 때 이 말은 현실이 된다.

 

마이클은 사업상 쿠바로 가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폭동을 목격한다. 곧이어 마이클은 자신의 형 프레도를 쿠바로 부르고 형이 배신자임을 알게 된다. 신년행사가 벌어지고 모두들 다가올 새해에 들떠있다. 하지만 밖에선 여전히 폭동이 일어나고 정부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 와중에 로스를 죽이려는 마이클의 계획이 행사장에 들이닥친 군인들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마이클은 형이 자신을 배신했음을 안다고 프레도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 군인들이 들어와 현 정권이 무너졌음을 발표한다.

 

사라진 정부...안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사태변화에 밖으로 나가고 마이클은 밖은 이미 폭동으로 엉망이 되었음을 본다. 그 가운데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형을 부르지만 형은 더욱 더 마이클에게서 달아날 뿐이다. 형제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증오하고 정부는 폭동으로 인해 무너지고 해체된다. 여기엔 무정부주의적 혼란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마이클은 톰으로부터 케이가 유산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화면은 그 소식을 들은 마이클의 얼굴에서 지금 막 태어난 프레도를 바라보는 비토의 얼굴로 넘어간다.

 

프레도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했다. 케이가 유산시킨 아이, 태어나지 못하고 엄마뱃속에서 죽은 아이, 마이클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더 이상 당신 같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그래서 죽은 아이...어쩌면 프레도는 그 아이의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난 지 모르겠다. 그리고 비토의 이야기는 돈 파누치의 살인으로 이어진다. 비토는 살인 후 거리를 걸어 계단에 앉아 있는 가족들에게로 간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마이클에게

 


‘아빤, 널 사랑한다’
라고 말한다.

 

독재자의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가족의 평화, 그 안에서 말해지는 사랑한다는 말. 마이클은 그 말에서 죽은 독재자의 냄새를 맡은 것일까? 마이클에게 아버지의 사랑이란 이때부터 살인행위와 연관된 기호로써 의미를 띈 것은 아닐까? 이것은 나중에 마이클이 아버지의 패밀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해병대를 선택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비토의 이야기에선 비토라는 한 개인이 돈 파누치라는 한 개인, 독재자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의 이야기에서 마이클이 경험한 건 폭동, 수많은 군중에 의해 몰락한 한 국가의 정권이다. 여기엔 더 이상 패밀리라는 가족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문제가 대두된다. 가족은 단순히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더 넓은 차원으로 뻗어나가고 한 국가를 무너트린 열정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으로 페이드 아웃된다. 마치 그사이 긴 잠을 잔 듯 그리고 깨어나듯 페이드 인이 된다.

 

배경은 완전히 바뀌고 영화의 시작, 행사로 사람들이 가득하던 마이클의 저택은 쓸쓸한 정적과 함께 흰 눈으로 쌓여있다. 모든 것이 황폐하게만 느껴진다. 그곳에 도착한 마이클은 집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이 공간이 얼마나 텅 비었는지 보여주듯 우리를 안내한다. 그리고 아내케이를 보지만 다가가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리고 마이클의 패밀리가 청문회에 소환되어 재판받는 장면이 이어진다. 동시에 마이클은 집안에 홀로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아버지에 대해 묻는다. 이탈리아어로...이탈리아어는 마이클에게 고향을 떠올리게 한다. 언어에는 그 나라특유의 정서가 기억되어 있어 그는 이탈리아어로 얘기할 때는 꼴레오네라는 패밀리로 연결되게 된다.

 


마이클 : 아버지는 패밀리를 잃으셨나요?

어머니 : 너의 아내가 아기를 유산한 이야기? 하지만 너희들은 아직 아기를 가질 수 있잖니?

마이클 : 아니요 제 말은 그분의 패밀리를 잃는다는 거죠.

어머니 : 패밀리는 결코 잃으면 안 된다.

마이클 : 시대는 변하고 있어요.

 

그리고 마이클의 얼굴위로 비토의 얼굴이 겹쳐진다. 위의 마이클과 어머니의 대화에서 두 세대간의 ‘패밀리’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얼마나 다른지 드러난다. 하지만 패밀리를 해석하는 의미의 차이는 대부1에서 다뤘던 문제이고 지금은 좀 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조직의 패밀리든 가정의 패밀리든 상관없이 패밀리자체를 잃는다는 것이다. 마이클의 대답 ‘시대는 변하고 있어요’ 가 끔찍하게 들리는 건 시대에 따라 패밀리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패밀리자체가 의미를 잃어가는 더 나아가 패밀리를 잃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 겹쳐져 나오는 비토의 얼굴과 비토가 패밀리를 조금씩 형성해나가는 과정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그것은 패밀리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형성되어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청문회의 자리에서 돈 꼴레오네가 아닌 마이클 꼴레오네라는 이름으로 선다. 그곳에서 그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범죄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무죄임을 주장하기위해 자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미국인인지를 선언문을 통해 주장한다. 법의 기만...그러니까 유죄와 무죄를 나누는 기준이 모호함으로, 법이 가진 기만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5년 안에 합법화하길 원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이 행하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 그저 사업임을 인정받기 위함이고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 미국에서 인정받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그저 법의 뒷받침을 필요로 할 뿐이다. 수단으로써의 법. 정의는 법과 다르다. 정의는 보편적이지만 법은 그 나라의 테두리 안에서 말해지는 것을 뜻한다. 보편적인 법은 말해질지언정 사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법을 사용하는 자들은 항상 자신의 이익에 맞게 이리저리 법을 비틀기 때문이다. 법이 홀로 존재할 때 법은 보편적이지만 법이 행해질 때 그것은 보편적이지 않다. 미국에서 미국시민으로 청문회를 받는 이상 마이클은 미국의 법과 질서 안에서 유죄와 무죄를 선고 받아야할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마이클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자신이 끝끝내 지키려고 했던 패밀리 이탈리아를 버리고 자랑스러운 미국인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내 케이로부터 유산이 자연유산이 아니라 스스로 행한 인공유산임을 듣고서 절정에 치솟는다.

 

 

"부정하고 사악한 낙태. 당신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걸 원치 않았어요..... 200년간 내려온 시실리규율을 어겼어요."

 

케이의 고백, 존재의 부정. 그것은 결국 마이클이 프레도를 죽임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다. 마이클은 케이를 내쫓고 아이들은 결코 데려가지 못하게 한다. 마이클은 이제야 자신의 아버지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떠나고 자신의 형제들이 죽고 고향을 지우는 순간, 이제 와서 아버지의 자리에 있길 원하고 있다.

 

그 장면 뒤에 이어진 비토의 이야기, 비토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복수를 행하고 기차를 타고 떠난다. 그리고 마이클을 안고서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마이클, 작별인사 해야지’라고 말한다. 어쩌면 마이클은 작별인사를 한 건지 모른다.

 

아버지의 땅 이탈리아가 아니라 아버지가 죽인 원수의 땅 이탈리아를 향해.....하지만 누구의 땅이든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이 작별인사는 마이클을 고향 이탈리아로 부터 영영 떠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고향으로 되돌아 갈수 없는 그 순간 마이클은 다시 아버지의 자리에 앉길 원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들 안소니를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미 기차는 떠났고 되돌릴 수 없는 결정만이 그의 가슴에 싹튼다. 그것은 오직 아들만을 긍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제외한 다른 자리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정케 된다. 가족이 모두 떠난 허울뿐인 자리, 무거운 권위만이 짓누르는 아버지의 자리. 마이클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리고 어머니마저 죽는다. 비토의 이야기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에서 시작했다면 마이클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해 어머니의 죽음에서 끝난다. 어머니가 죽던 날 여동생은 이 집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마이클의 옆에, 이 집근처에 와서 살겠다고 한다.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주겠다며...

 

엄마가 없으니 너에겐 내가 필요하지 않니?

 

그 대가로 마이클의 형 프레도를 용서해 달라고 한다. 대부1의 엔딩에서처럼 마이클은 긍정하는듯하지만 실은 거절의 제스츄어를 취한다. 마이클은 자신의 형 프레도를 용서한 듯 끌어안지만 시선은 자신의 조직원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케이는 마이클이 없는 틈에 자신의 아이들을 만나고 간다. 케이는 마지막으로 문 앞에 서서 아들 안소니에게 키스해달라고 하지만 안소니는 계속 머뭇거린다. 그때 마이클이 나타나고 안소니와 케이사이의 문을 닫아버린다. 마이클의 어머니는 죽고 안소니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 앞에 문이 닫힌다. 벽이 세워진다. 대부1에서 마이클과 케이사이에 벽이 세워졌듯이 어머니와 아들사이에 벽이 세워진다.

 

아버지 마이클의 손에 의해....어머니가 사라진 가정. 그 가운데 마이클은 아버지로 돌아온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란 삼항 구조. 이번엔 여동생이 어머니의 자리를 채운다. 죽은 어머니,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 두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리고 마이클은 자신의 형 프레도를 죽인다. 대부1에선 안소니의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던 비토가 죽고 대부2에선 프레도가 죽는다. 대신하던 두 아버지의 죽음. 그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실재아버지.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라는 자리, 오직 권위만이 존재하는 허울뿐인 자리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아버지는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린 후이기 때문이다. 고향으로부터 영영 떠나 그 끈을 잃어 버렸을 때 심지어 스스로 그 끈을 끊어 버렸을 때 아버지는 무의미해진다. 형제들의 죽음. 그 위에선 아버지란 자리는 그저 무의미하고 공허한 권위의 폭력만이 내재 할뿐이다.

 

그리고 다시 비토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마지막 비토의 이야기는 비토의 이야기라기보다 비토라는 아버지의 층위에 놓여있는 형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생일. 아직 아버지는 오지 않았고 큰아들 소니는 나중에 여동생의 남편이 될 인물인 카를로를 데려온다. 아탈리아계 미국인가정에 미국인이 들어온다. 그리고 이 미국인은 여동생과의 결혼으로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될 인물이다. 미국인 아버지의 출현(이 사실은 대부1을 본 사람만 알 수 있다)

 

소니는 카를로에게 형제들을 소개시켜주며 한명씩 이름을 부른다. 마치 이제는 사라져버린 인물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영원히 기억하려는 듯이...그리고 식탁에 앉아 패밀리사업에 대해 얘기한다. 마이클의 고백, 패밀리사업을 거부하고 해병대에 지원했다는...그것은 패밀리에 대한 거절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오고 마이클을 제외한 형제들이 식탁에서 나가 아버지를 맞이한다. 물론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형제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소리로 존재할 뿐이다. 보이는 건 식탁에 혼자남아 있는 마이클이다.

 



고향을 잃어버린 인간, 아버지가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맞이하지 않는 인간, 가족이 떠난 식탁에 홀로 앉아있는 인간, 고향으로 되돌아 올수 없는 기차를 탄 인간, 낙엽 진 들판에 앉아 홀로 쓸쓸히 아버지의 권위만을 가진 인간, 어쩌면 그것은 다문화 다국적 세계화를 외치며 점점 경계를 잃어가는 시대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 아버지라는 의미마저 부정케 할 때 그래서 그 뿌리에 닿아있는 형제들까지 부정할 때 그리고 이런 부정에 의해 긍정된 아버지는 그저 공허한 개념 일뿐이다. 아버지는 부정의
대상 아니라 끌어안고 살아가야하는 존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