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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로코와 그의 형제들, 불편한 네오리얼리즘

 

 감독 : 루키노 비스콘티 (1906~1976)


1. 네오리얼리즘(1960)

 아주 오래전 유독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찾아서 보질 않았던 적이 있다. 충분히 보아야할 이유를 갖춘 영화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도 모를 거부감이 들었던 건 아마도 이 당시 이 영화를 거부했던 사람들의 생각들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간단히 말해 너무나 사실적인 세계를 굳이 극장에서 까지 느끼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6.25 전쟁 후에 관객들이 굳이 현실을 재구성하여 극장에서 전쟁영화를 보며 그 고통을 연장 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네오리얼리즘의 태생이 바로 그러한 상황이다. 그 말의 기원이 어떻든 전쟁 뒤 폐허가된 이탈리아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즉 그 시대의 모습을 영화로 표현 한다고 했을 때 과연 묘사된 이미지들이 물론 몰락해 가고 있던 이탈리아 영화계에 단비를 내려줬다는 의미에서 ‘영화적‘으로 만들어지는 혹은 관객들에게 보여지는 가치는 있겠지만 대중적인 심리를 통한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것에서 동의를 구하고 의미를 찾아 가치를 따지기란 다소 어려워 보인다.

 

 혹여 대중이 파시스트 정권의 몰락과 전쟁의 좌절감과 굴욕감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로 영화를 감상한다면 일정부분 동의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반대로 생각 하는 것은 이 영화를 만드는 그 시대의 이탈리아 영화감독들이 대부부분 공산당원 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들의 정서가 과연 전후 이탈리아 사회를 있는 그대로 가치 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과 그 영화를 보는 대중들을 이용하여 붕괴한 정권에 대한 복권의식을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무의식적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스탈린도 무솔리니도 (북한엔 <김정일 영화연출론>도 있다.)영화를 이용하고자 했던 인물들이었으니 말이다. 이것이 전 후 라면 아마도 사회를 위해서(통합, 선동)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감독개인의 정치적인 성향과 영화가 가지는 입장을 통일 시켜서 판단하려는 의식도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영화는 만드는 감독개인의 정치적인 성향을 문제 삼는 다는 것은 그것이 영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재를 깔아 버리게 되는데 이것은 1차적인 생각으로 영화비평 혹은 감상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생각이다. 감독 한 개인이 좌익이라고 해서 영화가 진보적 성향을 가졌다거나. 우익이라고 해서 보수적인 영화를 찍는다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유치한 추측일 뿐이다. 민주신당에 소속된 박찬욱과 봉준호가 만들어내는 영화들을 보자, 그들이 만드는 영화들에서 좌익을 선동하고 진보를 향하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그들의 삶속에서 예술가로서 지향해야하는 정치적인 입장일 뿐 그들에게 영화는 단지 영화로서 기능할 뿐인 것이다. 그러니까 원론으로 돌아가서 영화는 극장에 불이 꺼지는 순간 꿈의 순간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좌와 우를 떠나서 개인의 판타지로 넘어가는 순간이라는 말이다. 관객이 극장에서 나오는 순간 삶의 변화를 바란다면 그들은 파시스트처럼 사회주의 혁명가들처럼 영화를 교육의 의미로서 대중을 선동하려는 의미로서 사용한다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니면 감독 스스로 정치적인 포퓰리스트로서 살아간다고 하거나 프로파간다가 되어 버리는 것이고 이것은 영화예술로 생각해 볼 때 사회적으로 자살해 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곧 영화를 파시즘으로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역시 성향과 영화의 관계를 일차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능한데 여러모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탈리아 리 얼리즘 영화가 싫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심의 꼬리를 늦출 수 없는 것은 영화와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등치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게 내입장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정말 염치없는 시대였다. 오히려 난 누벨바그의 아이들이 솔직한 개구쟁이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직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영화를 찍는 고다르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급진적이고 혁신적이며 새로움과 영화에 대한 표현의 영역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쉽게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영화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하여도 그것은 영화에서 그칠 뿐이다. 관객에게 교묘한 방법으로 동화를 시키거나 교화나 교육을 하려 한다거나 선동이 목적이라면 불가능한 영역에 다가서려는 것이다. 고다르는 이미 그것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것은 안다는 표현으로는 조금 부끄러운 것이다. 상식이다. 인간으로서 영화로서 모두가 다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래선 안 된다. 

 

 어쨌건 삶의 일말의 희망 아픔을 조장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을 사실인 냥 포장하는 것은 리얼리즘의 가장 큰 단점이고 폐해다 영화는 기록 매체이지만 그것이 의식으로서 사실화 됐을 때 어쩔 수 없이 그 당시의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2.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

 이 영화는 가족의 관계와 해체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인간이 가장 처음 관계를 맺는 가족이라는 집단 그 안의 끈끈한 정 그리고 아무리 부정하려해도 형제는 형제이고 어머니는 어머니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 자리한 가족. 가족은 삶의 원천이고 힘이 된다. 가족은 삶을 대부분의 동반하는 동반자의 역할로서 기능하며 가족은 일체형 소집단으로 개인의 수익은 모두의 수익이 되는 경제관이 성립된다. 그 반대가 된다면 어떨까? 로코와 그 형제들은 반대의 경우가 되면 어떻게 변하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족이 분할되고 수익의 근원이 집중이 아닌 분산이 되어 버릴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이다. 가족 구성원중 하나가 힘들면 모두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비스콘티는 가족은 서로에게 무관심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한다. 무관심은 곧 고통으로 이어지고 자기 파멸만이 남는 길인 것이다. 빈첸노가 그랬듯 언젠가는 가족집단에서 빠져나와 자기중심의 또 다른 가족을 꾸리게 된다. 하지만 그것역시 이전의 가족의 동의가 구해지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집단은 이렇듯 사회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집단이기도 하며 자칫 잘 못하면 쉽게 깨어지고 상처 받을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하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에서의 가족은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형제들의 여자와 관련된 문제 개개인의 개성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인간의 단면을 고스란히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인간의 죄의 식에 관해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형제를 저버려야 하는가. 쟁취하지 못하는 사랑을 죽음으로 영원성을 보장할 것인가. 그 죽음은 죄로 뒤덮여지게 되는데 죄의 허물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파멸의 순간 그를 구원해 줄 것은 누구인가? 카톨릭의 성지, 이탈리아. 영화 속 인물들은 구원을 위해 죄의 씻김을 위해 신을 찾거나 그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파멸 그 순간으로 내 달릴 뿐이다. 신을 찾는다는 것은 아마도 모든 행위에 대한 반성이 될 테고 그 반복을 차단당할 테고 희망을 부르짖을 테고 그것은 일종의 해피엔딩이기에 의미를 상쇠 시켰을 수도 있다. 때문에 당시의 리얼리즘은 영화 자체로 성립되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주인공이 찾는 것인 무엇일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때 결국 손을 뻗거나 손이 뻗어 오는 곳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인 것이다. 가족 공동체는 하나의 사회라는 말을 앞서 했다. 이 사회는 하나의 국가로서 상징화시키기에 충분하다. 국가라는 공동체가 시민을 권리와 의무로 보호 받게 해주거나 권속당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조장하는 것이라면 가족이라는 미명의 공동체는 사회의 최소 단위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최대의 가치가 있는 것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삶의 의미가 가장 크며 언제든 손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국가와 가장 다른 점이다. 언제든 손을 잡고 싶다고 해서 잡을 수 없는 것이 국가이고 자신이 죽을 입장에 놓여있다고 해서 손을 뻗어 주는 곳이 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비스콘티는 형제들을 통해서 국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술수를 쓴다. 이를테면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다. 권력의 중심 아버지는 사라져 버린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암시하지만 지배를 어머니로 두고 파멸을 여자로 둠으로 남성 사회의 끝을 보여준다. 만약 마지막에 나디아를 죽이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는 180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을 파멸로 이끈 것은 남성사회의 재정립을 원하는 목소리로 들린다. 곧 영화로 파시즘적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부단한 노력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렴 우리가 어리석다 한들 그러한 얕은 술수에 넘어갈 성 싶은가. 흔한 드라마 속에 어떤 감동을 느껴주길 바라는가 당시의 네오리얼리즘을 염치없이 까대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한국의 아침드라마 속의 ‘막장‘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을까?. 배경과 배우들의 생김세가 다른 것 말고 뭐가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근본적으로 문제시 되는 것은 아마도 사회적 가난이라 생각된다. 비스콘티가 표면적으로 가난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소시민적 일상을 담아내려는 노력을 한 사람임은 누구나 안다. 여기선 표면적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질문을 다시 해야 하는데 표면은 영화로 ‘이용한다‘와 동일한 말이다. 표면적이라는 말은 심층적인 의미의 반대말이며 표면적이라는 말은 사실을 덮어 버린다는 말이기도 하다. 왜 하필 우린 그런 가난 앞에서 힘들어 해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왜 비스콘티는 가난이라는 가면을 우리에게 그리고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씌우는가. 영화가 사회적 가난을 가난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감상주의에 빠진 비스콘티의 우울한 자화상을 본다는 것은 삶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을 보여준다는 것은 극영화가 할 일이 아닌 다큐멘터리라는 훌륭한 영화표현법이 있지 않은가? 가난은 일면 사회의 붕괴의 암시이며 권력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하나의 소재 일뿐이다. 이어서 가난을 극복해 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사회의 구조가 모순적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가난을 이겨낸다고 하는 것은 꿈과 같은 일이며 때문에 비스콘티의 형제들은 광적으로 행동하길 꺼리지도 않는다, 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비스콘티가 보여주는 가난이라는 표면을 생각해보자. 가난은 평등하지 않다는 말이다. 평등하지 않다는 것은 계급을 구분시킨다는 것이다. 계급은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적 상황으로 본다면 봉건사회로의 회기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즉 가난의 선택은 비스콘티가 극단의 선택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공산주의는 붕괴했다. 결국 가난은 모든 이념을 통틀어 극복되지 못하는 문제이다.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유토피아적 환상은 사회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였으며, 실현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비스콘티가 바랐던 사회는 단순한 재산의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한 인간소외의 극복, 인간성의 적극적인 회복을 의미하였을 테고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그에게 더욱 삶을 영화로 끌어당기는 요소가 된 것 일수도 있다.

 

 영화속에 하늘에 내리는 눈이 좋아서 방방 뛰는 개가 한 마리 카메라에 잡힌다. 이것은 자본주의 속의 우리들일 뿐이지 사실상 이들은 단지 눈이 오기 때문에 일거리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으로 좋아한다. 물론 나가는 길에 주머니 가득 돈을 챙겨오라는 어머니의 말도 빠지지 않는다. 이들은 밀라노의 복지정책을 이용해서 집을 구하기도 한다. 월세를 안내면 집에서 쫓겨나고 정부에서는 집세를 낼 수 없는 사람들로 분류해서 공짜로 집을 구해준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가난으로 그것을 활용하여 이득을 보는 유쾌한 경우가 분명 있다. 영화는 형제들 각각의 이름을 걸고 챕터화 시켜서 서사를 전개한다. 한마디로 비스콘티 개인의 시간의 채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간의 간극이 큰 지점에 다다라서는 과연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고민하게 되는 그리고 장면전환의 극적인 효과들로 그 안에 인물들의 감정의 힘을 빌리지 않았더라면 단순한 감독의 시간 채집으로는 이루어내지 못하는 큰 부분이 분명 있었다고 생각한다. 로코가 갑작스럽게 군대에 가게 되고 이후에 나디아와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의 서사 진행은 다소 따라잡기 힘든 부분도 일견 있긴 했지만 그만큼 로코의 시간이 빠졌을 때 그 사이 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은 것은 그 부분이 아마도 쌓아 놓아야 할 그러니까 별 탈 없이 지나가는 시간들은 이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치부를 들어내는 것은 평범한 모습으로 는 설명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 영화는 가족, 사회적 가난뿐만 아니라 사랑도 한 몫을 한다. 형제들의 사랑, 기이한 여인의 등장은 이 이야기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처음 밀라노에 도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곧이어 장남인 빈첸조의 집으로 향한다. 때는 약혼식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런 고급스러운 집의 파티 같은 순간은 보여 지지 않는다.) 이어 약혼파티가 깨진다. 잘 곳이 없는 로코의 가족들을 괄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형제들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당신들의 도움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며 항변한다. 가난해도 자존심을 절대 버려선 안 되는 것처럼 들린다. 뿐만 아니라 비스콘티는 극단으로 상황을 몰아간다. 그러한 극단적인 비극의 시작점은 여자의 첫 등장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영화 문법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점이 발현된다. 이전의 약혼식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서 카메라가 움직이고 인물이 움직이면서 주변인물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 졌는데 나디아가 로코의 집에 발을 들여 놓자 이곳에선 나디아의 움직임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녀를 남성 안에 가두어 버리는 방식을 사용한다. 새로운 여인이 남성들의 공간에 들어든 순간 어머니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형제들은 의자에 앉아 음흉한 혹은 순수한 관심으로서 그녀를 바라본다. 특히 사건의 발단이 되는 두 형제 로코와 시몬의 표정은 조금 더 확대 된다. 그리고 이들 형제들의 미소는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감옥에 오래 있어 여자에게 굶주린 사람 마냥 여자의 냄새가 풍기는 순간 오로지 아직 남성이라 부르기 힘든 어린 루카만이 의심의 눈으로 나디아를 바라본다. 그리고 불현듯 나디아는 화장실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어머니의 직감은 정확하게 여인을 판단한다. 만나지 말라는 것. 하지만 아들이 맡아버린 나디아의 묘한 매력이 풍기는 페르몬은 그들을 마법에 걸리게 만든다. 나디아가 사라지고 나서 그들은 그대로 감상에 젖어 버린다. 순간 그들의 삶에 잠시나마 침투했던 그녀에 대한 생각에 빠진 것이다. 불운의 전주곡이다. 로코는 사랑 노래를 부르고 시몬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영화를 두 번 보게 될 경우 참으로 슬픈 장면중 하나이기도 하다.

 

 

 형제들 간의 싸움은 아주 오래전 성경부터 신화 속에서 많이 등장해 왔다. 하지만 대개 둘 중의 하나가 죽게 되는데 여기선 적어도 눈물로 참회의 물꼬를 틀려고 함이 보인다는 게 조금은 다르긴 하다. 이들의 아픔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고 있는가? 그리고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형제를 도우려고 하고 누구는 필사적으로 버리려고 하는가. 결국 이 영화는 남성과 여성이 에로스의 폭발로 인한 타나토스로의 귀착을 보여준다. 시몬의 집착은 자신을 파괴하고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다. 그리고 마지막 심지어는 스스로 칼을 들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까지 결심을 한다. 자신의 사랑이 또다시 받아 들여 질지 의심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무엇을 진심으로 원할 때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만날 때 우린 죽음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시몬은 그 반대의 경우를 경험한다. 가질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 난 문득 이것이 일반적인 분노라든지 단순한 질투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가 우두커니 서서 칼을 꺼내들고 천천히 나디아의 뒤로 다가가서 칼을 찌를 때 그 첫 찌름의 접점과 이후에 여러 번 찔리게 되는 칼부림 장면의 대비는 확실히 그녀의 죽음의 의미가 단순한 의미의 죽음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다가오는 시몬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십자가를 만들어 자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던 것일까 구원을 바랬던 것일까 아니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기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을까. 나디아는 그 순간 신에게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며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순간 이미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영화적 숏의 그림은 그런 의미를 보여주지만 실제적으로 나디아는 예수일 수는 없다. 그녀는 실제로 자신의 앞에 닥친 죽음에 외소해지는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누구나 그렇듯 살고 싶어 발버둥 친다. 그리고 죽는다. 그녀의 죽음은 결국 시몬의 진정한 파괴로 이어진 것이다. 나디아의 죽음은 가족의 위기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의 눈물에는 나디아의 죽음에 대한 애도뿐만 아니라 형에 대한 미움과 설움 그리고 앞으로 불투명해지는 그의 미래에 대한 걱정 등 정말 많은 것들이 담긴 눈물이라고 생각된다.

 

3. 마무리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거부감 때문에 사실 이영화의 진면목을 놓쳤을 수도 있다. 예술작품을 편견을 가지고 영화를 봐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일 뿐이지. 영화사적 의미에서 이 시대의 영화들에 박수를 보낸다. 왜냐면 영화와 리얼리즘이라는 것, 그러니까 삶을 그대로 영화 속에 나타내어 보여준다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그래도 오직 영화만이 시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영화가 대중으로서 대중을 주인공으로 삼는 부분역시 박수를 보낸다. 결국 삶의 주인공은 영화를 보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우린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 가. 누구의 밑에서 일을 하고 있는가. 누구의 돈을 벌어주려고 열심히 일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답은 쉽게 나올 것이다.....................눈이 와서 일거리가 생겼다며 온 가족이 기뻐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가족의 행복은 이와 같은 소란스러움이 아닐까. 모처럼 전부 모인 아들들에게 아침밥을 먹이며 어머니는 행복을 맛본다. 그런 어머니 뒤로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보인다. 아들 모두가 어머니의 손에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선다. 온 가족이 모두 함께였던 이 행복은 이제 다시는 영화에서 나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 버린다. 눈 내린 날에 눈은 축복이라고 말했던 어머니의 말을 그들은 마지막 순간 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도 나의 어머니에게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니 이제 어른 대접을 해달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 정말 더 어린 행동일 뿐일까. 사실 어머니에게 나는 아직도 어린 아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