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존재 그리고 시선
내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에 대해 확신이 생겼다. 그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거기에 있게 되는 영화이다. 쇼트는 하나의 시선이 된다. 시선은 바라보는 자와 보이는 자를 양 끝에 놓는다. 시점쇼트에서 바라보는 자는 쇼트너머 외화면에 있고 보이는 자는 화면 안에 있는 관계이다. 하지만 쇼트자체가 시선이 되고 그 시선으로 인해 존재할 때 바라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시선의 주체는 객체의 자리에 있게 되고 시선은 끊임없이 주체의 자리를 비운다. 그와 동시에 화면 밖의 공간은 화면안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나는 사라지고 네가 되는 그런 세계이다. 그 세계에선 ‘나’라고 말할 수 없다. 언제나 ‘너’라고 발음되어야 한다. 히치콕이 결국에 만들고자 하는 세계가 이런 세계가 아니 였을까 의심해본다. 히치콕의 시선은 현기증에서와 같이 소용돌이의 모양을 지닌다. 그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자를 자신도 알지 못하게 대상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드는 그래서 끊임없이 주체의 자리를 비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히치콕의 시선은 바라보는 자를 보이는 자의 자리에 놓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것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바라보는 자가 보이는 자의 자리에 다가설 때 보이는 자는 죽어버린다.(현기증) 혹은 보이는 자가 바라보는 자의 자리에 올 때 바라보는 자의 생명을 위협한다.(이창) 여기서 비워짐은 언제나 거기 있는 자의 죽음을 요구한다. 이 지점이 히치콕의 한계인 동시에 고전영화의 한계가 아니 였는가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트뤼포가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극찬한 히치콕의 ‘이창’에서 더 나아간 영화가 나올 것이라 믿는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 - 스텐리 큐브릭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하얀 방은 이 한계를 넘어선다. 쇼트는 완전히 하나의 시선이 되고 시선 안에 주체와 객체는 사라진다. 이 가능성은 시선이 공간의 연결이 아니라 시간의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히치콕의 시선은 언제나 현재 위에서 성립한다. 시간은 고정되어 있고 그곳에서 자리는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충돌로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즈의 공간들이 시간 화되고 인물들과 함께 자리를 바꾸어갈 때 거기엔 히치콕이 가지지 못한 많은 비전을 제시해준다. 오즈의 영화는 쇼트자체가 바로 하나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인물의 시점샷 조차 그것은 결국 카메라의 시선이다. 그러니깐 오즈의 쇼트들은 모두 하나의 시선이다. 동시에 그것은 바라본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즈의 쇼트는 아무리 인물에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닿을 수 없는 거리를 우리에게 인식시킨다. 인물과 인물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때 카메라는 조심스레 그 가운데에 자리 잡고 둘 사이를 쇼트로 오간다. 그렇기에 카메라의 자리는 언제나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인물들이 카메라 너머에 있음직한 상대를 바라볼 때 시선은 카메라를 살짝 빗나간다. 좀 더 자세히 말해 카메라를 바라보는 순간에도 그것이 말을 건네는 상대방의 쇼트와 연결될 때 시선은 언제나 어긋난다. 쇼트와 쇼트사이에서 카메라는 주인집에 초대된 손님, 낯선 이방인마냥 불편해한다. 오즈의 쇼트가 모두 시선인 것은 카메라의 존재를 숨기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고다르가 카메라를 의식적으로 영화에 드러냈다면 오즈는 카메라를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동경이야기(대화장면) - 오즈야스지로
영화를 찍을 때 감독은 시나리오를 들고 배우에게 연기를 시킨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가 되기 위해선 카메라를 배우에게 가져가야한다. 하지만 이때 감독은 어떤 죄의식 같은 걸 느낀다. 카메라는 그 배우조차모르는 은밀한 무언가를 훔쳐내기 때문이다. 브레송이 카메라를 다루는 방식이 이와 같을 것이다. 브레송이 배우를 수많은 리허설을 통해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할 때 브레송이 카메라에 담고 싶은 것은 의식하지 않는 배우의 몸짓과 표정 그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미 날아가 버린 나비를 포착하기위해 빈 번데기껍질을 바라보는 자의 태도일 것이다. 브레송의 영화에 대한 영화는 ‘소매치기’이다. 브레송의 쇼트는 얼굴과 눈 그리고 손에 관한 것이다. 시골자제의 얼굴은 불빛과 그늘 그리고 소리가 새겨지는 인물의 세계를 이루고 그곳에서 인물은 신에 대한 은총을 갈망한다. 설사 그것이 외부세계에 의해 좌절된다하더라도 자신의 얼굴, 내부세계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브레송의 얼굴이 눈으로 옮겨갈 때 즉 외부세계가 새겨지는 얼굴이 눈이라는 창을 통해 외부세계로 옮겨질 때 은총은 무력해 진다. 얼굴이란 층위에선 외부세계의 악은 내부세계라는 크나큰 신의 은총. 거대한 우주, 바다에 의해 용해될 수 있는 구원될 수 있는 바탕 이였다면 그것이 창문이라는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이 오가는 눈으로 옮겨졌을 때는 역전현상이 벌어진다. 외부가 내부에 용해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가 외부 속으로 용해되는 것이다.
여기에 브레송의 절망이 있다. 브레송은 얼굴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신의 은총을 보았다. 온갖 세상의 악에 의해 얼굴을 비추던 불빛이 꺼지고 그늘이 지는 고뇌의 순간에도 신에 대한 은총, 구원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내면의 얼굴에서 외부세계로 이어진 눈으로 향하는 순간 점점 그 믿음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 눈에 의해 브레송의 세상은 내부에서 외부로 옮겨진다. 절망의 순간에도 눈은 마음의 창이니라. 그 눈은 당나귀 발타자르의 눈이자 무셰트의 눈이다. 발타자르의 눈에 새겨진 세상은 시골사제의 얼굴에 새겨진 세상과는 다르다. 외부세계는 여전히 악으로 물들어 있지만 얼굴에 새겨지는 지, 눈에 새겨지는 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시골사제의 죽음과 당나귀 발타자르의 죽음은 그 의미가 다르다. 시골사제는 자신의 병에 의해 죽지만 발타자르는 외부의 폭력에 의해 죽는다. 이것은 동시에 발타자르의 친구이자 주인인 여주인공의 타락 혹은 죽음과도 연관된다. 말과 글, 소리 혹은 시선으로써의 간접적인 접촉이 채찍과 폭력, 총에 의한 직접적인 접촉으로서 악이 실현될 때 여기서 인물의 내면은 외부 세상에 자신을 내어준다. 내부가 외부를 바라볼 때 내부는 사라지고 오직 외부세상만이 남는 것이다.
이것이 브레송 영화의 변화이다. 시골사제의 쇼트가 얼굴을 통해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이였을 때 주체인 외부는 객체인 내부에 의해 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눈이 되었을 때,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기관이자 외부와 내부가 오가는 창이 되었을 때는 오히려 외부를 바라보는 내부가 외부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무셰트는 목소리가 사라진 지점에서 시작한다. 좀 더 정확힌 말하면 내부에 병을 앓고 있는 자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영화는 시작한다. 이것은 어쩌면 시골사제의 죽음이후에 오는 영화일 것이다. 인물은 더 이상 내면에 병을 키우지 않는다. 그리고 그 병에 의해 죽지 않는다. 이상하게 병은 악이 되었다. 이 말은 더 이상 인물들이 외부의 악을 내면에 담길 포기 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인물들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즉,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다. 병든 얌심보다 건강한 죄악을 선호하는 인물.
로베르 브레송
그런 의미에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끊임없이 병을 끌어안는다. 이 말은 외부세계의 악을 자신의 내면에 담으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병이란 바로 외부를 내면에 담으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외부를 향하는 시선을 거두면 내면에 담기는 것은 결국 공허한 유희 혹은 타락한 건강이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텔지아’ 에서의 유명한 장면, 심장병에 걸린 채 끝가지 촛불의 옮기려는 음악가의 노력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 브레송이 얼굴에서 눈으로 옮겨왔을 때 그의 눈의 시작은 무셰트에서 밀렵꾼과 살림감시원의 눈 그 사이오가는 잔인한 시선일 것이다. 여기서 시선은 하나의 덫으로 대상을 옭아맨다. 그리고 눈은 손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쇼트는 정확히 시선이다. 인물의 눈과 손은 접속한다. 이것은 동시에 접촉을 의미한다. 무셰트에서 그녀를 절망 케한 것은 그녀의 눈에 보이는 세상이었다. 여기서 그녀는 그 눈에 의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무셰트는 아직 자신의 눈에서 손을 접속시킬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해 아직까진 손이 눈의 영향력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증오심을 세상에 되돌려주어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온전히 가슴에 담고 죽는 것이었다. ‘당나귀 발타자르’의 소녀에서도 손은 그녀의 눈 아래 숨죽이고 있을 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선 바라본다는 것이 무력함과 수동성을 의미한다. 세상을 바라보던 인물이 세상을 파괴할 때 그것은 손의 사용을 말한다. 손은 도구의 사용과 연결된다. 눈에 의해 연결되던 것은 외부 세상이지만 손에 의해 연결되는 것은 도구이다. 그리고 도구의 사용은 여태까지 자신을 괴롭힌 외부세계에 대한 복수로 이어진다. 이것이 브레송의 후기영화이다. 아직 ‘소매치기’에서의 손은 눈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손은 도구대신 눈을 바라보는 곳에 닿게 한다. 눈의 존재감. 여기서 브레송은 은총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눈의 영향아래 있는 손, 마치 신의 영향아래 있는 인간처럼...‘소매치기’에서 쇼트는 시선이 된다. 이것은 말 그대로 눈이 바라보는 곳에 손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후기영화의 폭력적이고 어두운 비전은 눈에서 벗어난 손, 즉 더 이상 바라보기를 그치고 오직 행동하고자하는 손의 조급함이다. 브레송의 유작인 ‘돈’은 그런 의미에서 얼굴로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여정으로 보인다. 자동지급기에서 돈을 꺼내는 손에서 도끼를 잡는 손 그리고 술집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인물의 얼굴. 시선의 문제는 결국 존재의 문제와 이어진다.
무쉐트(Mouchette.1967)
내가 바라보는 순간 나는 그곳에 있는 것일까? 오즈는 카메라를 불편한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인물 앞에 카메라를 놓고 찍을 때 항상 그 메울 수 없는 거리에 대해 생각했던 거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즈는 이 거리를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즈는 클로즈업을 찍을 때조차 무한한 거리가 나타난다.(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즈의 영화중에 클로즈업이 단 하나있다. 딸을 시집보내고 방으로 돌아와 아버지 혼자 사과를 깍을 때) 이 거리에 의해 쇼트는 시선이 된다. 이것이 허우 샤오시엔과 오즈를 이어주는 끈 일 것이다. 오즈는 누구보다 영화의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것을 기꺼이 껴안은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멀리 밀고 나간 사람이다. 사실 영화의 역사는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를 최대한 파괴시켜 그 거리를 소멸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그것은 영화가 현실을 대체하고 대체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오즈는 애초에 그 믿음을 버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 영화는 현실을 닮으려는 소모적인 노력을 그치고 현실이 품고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현실은 완성된 무엇이 아니라 언제나 가능한 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역사가 그토록 메우려고 했던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거리는 결국 시선이다. 카메라는 결국 바라보는 도구이고 영화를 보는 내가 보는 건 정확히 말해 인물이 아니라 카메라의 시선이 되는 것이다. 이때 영화를 보는 우리가 영화 속 인물과 동화되는 건 단지 보는 것만으로 그 시선을 따라 우리가 있는 자리가 비워지고 인물의 자리에 가 닿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영화에서 말하는 리얼, 감정몰입은 시선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때 정말 문제시되는 건 이 시선을 감추느냐 드러내느냐하는 문제이다. 영화의 역사는 이 시선을 감추는 데 이바지 해왔다. 왜냐하면 이 시선이 드러나면 감정몰입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모순적인 사실에 직면해있다. 감정몰입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시선에 의해서이다. 하지만 이 시선이 감정몰입을 방해 한다 그러니깐 이 시선은 감정몰입을 성립해주고 서둘러 자신을 감추어야하는 운명이다.
우리는 시선이 만들어 낸 감정몰입만 취하고 그 시선을 억압하고 감추는 기만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 위대한 영화는 이를 고발한다. 시점 샷은 한계를 가진다. 그것이 히치콕의 한계이다. 하지만 히치콕은 이 한계로 인해 거장이 되었고 그의 서스펜스역시 이 시점 샷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히치콕이 이루어낸 스릴러라는 장르, 서스펜스가 주는 효과는 시점 샷이 만들어 낸 한계 안에서 가능한 것인데 여기서 한계는 바로 죽음 혹은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말한다. 주인공이 무언 갈 바라보고 보이는 대상이 그 주인공으로 다가와 바라보는 자인 주인공을 위협한다. 혹은 숨어 있는 주인공의 주위를 배회한다. 여기서 시간은 현재로 고정되어 있다. 쇼트는 아직 시간의 층위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같은 공간 안에서 인물들 간의 자리다툼, 충돌이 생긴다. 이것을 희극적으로 표현하면 채플린영화가 되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시점 샷을 공간의 나눔이 아니라 시간의 나눔, 시간의 층위로 생각해보자. 그러니깐 같은 공간 안에서 주인공이 대상을 바라볼 때 바라보는 자인 주인공이 과거에 있고 바라보이는 자가 미래에 있다고 설정하는 것이다. 시점 샷에선 오직 현재의 공간이었다면 시선이 된 쇼트에선 과거와 미래만이 있다. 여기서 현재는 쇼트를 연결시키는 간격, 카메라이다. 이 순간 히치콕의 서스펜스는 증발된다. 두 인물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대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이 대상에 의해 발각되어 주인공에게 다가가더라도 이미 그곳엔 주인공은 없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타나는 건 데이빗 린치의 영화일 것이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 바라보는 자와 보이는 자는 무의미하게 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거기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인 진정한 카메라 존재론일 것이다. 시점 샷이 필요 없는, 쇼트자체가 시선이 되는 그런 영화. 카메라의 시선만으로 거기 있게 되는 영화. 그것은 말 그대로 존재와 영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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