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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대부(Godfather part1) 1972년 (2010년 디지털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1)

감독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시대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 변주된다.

  나는 이 영화를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시작해보고 싶다. 그 유명한 대부의 엔딩 씬. 마이클의 아내 케이가 있는 공간과 마이클이 패밀리와 있는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 그것은 문이 닫히며 관객에게 검은 무지로서 스크린을 하나의 벽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영화는 스크린을 완전히 검은 무지로 끝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이 돈 꼴레오네가 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될 일은 아내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족, 즉 자신이 일구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대부로 선 아이의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정 내의 아버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정보다 더 큰 이념으로써 마피아조직, 바로 그들. 패밀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Godfather... 그는 말 그대로 대부가 된 것이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대부가 실재아버지를 죽임으로써 마침내 Godfather가 되는 것이다. 이때 대부는 대부(代父)가 아니라 대부(Godfather)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제목에 좀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God, Father 두 개의 명사가 이어졌을 때 사실 그 사이에는 생략된 부호들이 존재한다. 다시말해 두 명사사이에 ( )가 쳐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 )에 의해 영화에서 돈꼴레오네와 마이클 그리고 주변사람들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God(to)Father, God(and)Father, God(but)Father, God(is)Father 등등 그리고 결국엔 God(=)Father으로 만듦으로서 ( )자체를 없애고 Godfather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영화를 단지 패밀리의 사업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아들이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점점 패밀리의 사업에 관여하고 그로써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로 읽는 것은 내용을 단지 표면적으로만 훑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좀더 중요한 것은 단어들이 가지는 모호한 의미 변화이다. God, Father, Family라는 단어들이 가지는 모호함. 단어들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인물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 놓이게 된다. 마이클은 자신의 아들에게는 아버지임에도 아버지가 되길 거부한다. 영화 속에서 마이클이 자신의 아들과 함께 있는 장면은 거의 없다. 아니 실제로 아버지로써 있는 장면은 없다. 그는 패밀리의 아버지로써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아내 케이와의 결혼장면이 없다. 사실상 케이와의 결혼장면은 이탈이아에서의 시골여자와의 결혼장면으로 대체 된 것이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대체된 걸로는 부족하다. 마이클은 케이와의 결혼을 거부하고 이탈리아 시골여자와의 결혼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을 거부하고 꼴레오네의 뿌리, 이탈리아를 선택한 것과 같다. 이미 그가 솔론조와 비리경찰을 죽이고 이탈리아로 떠나는 순간 그 선택은 예정된 것이다. 미국이란 땅을 떠나 이탈리아, 꼴레오네의 고향, 근원으로 돌아가는 여행. 그것은 미국에서 태어난 마이클이 미국을 버리고 자신의 더 깊은 뿌리를 찾아 무너져가는 패밀리를 다시 정화시키고 일으켜 세우려는 영웅신화와도 비슷하다.

 미국과 이탈리아의 배경 역시 대조된다. 미국의 어둡고 침침한 뒷골목. 그리고 그곳에서 큰형, 소니는 자신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격정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려했던 타타글리아 조직의 아들을 죽인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대사로 보여 진다. 나중에 다시 보여지겠지만 이모든 계획을 모의한 것은 타타글리아가 아니라 바지니임이 드러난다. 소니는 자신의 쉽게 흥분하는 성격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성격은 바지니의 덫에 걸리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는 원인이 된다. 


소니의 죽음


 미국에서 꼴레오네 조직이 무너져갈 때 마이클은 자신의 조직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미국이 아닌 꼴레오네의 고향, 이탈리아로 되돌아가 그 힘을 되찾는다. 그리고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여자와 이탈리아식으로 결혼식을 치른다. 그곳에서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점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때쯤, (왜냐하면 결혼한다는 것은 그곳에 정착하겠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여기 역시 안전하지 못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자신의 형 소니의 죽음과 자신이 이탈리아에 머무는 이유인 아내마저 타조직의 암살시도에 의해 죽게 된다. 자신이 타야할 차에 아내가 먼저 탔고 차는 그대로 폭발해버린 것이다. 결국 마이클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이탈리아는 더 이상 그의 자리가 아닌 것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다시 시작한다. 돈 꼴레오네 즉, 마이클의 아버지는 마이클의 주위를 맴돌며 그저 서성인다. 마치 자신의 자리는 더 이상 여기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하는 유령처럼...왜일까? 아직 아들은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는다. 아버지 역시 그런 아들이 위태롭기만 하다. 영화의 첫 장면, 자신이 의뢰를 받고 앉았던 자리, 그 실내 공간은 더 이상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마이클의 중심으로 재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 편성에 놓여질 수 없는 자, 만족할 수 없는 자는 중심을 겉도는 자신의 돈 꼴레오네에게 사정을 얘기해보지만 그는 더 이상 이 공간에서 이루어진 결정을 바꿀 힘이 없다. 그는 여기 있지만 사실상 여기 없는 것이다. 여기 있는 자는 마이클이다. 그들이 여기 없는 자를 원하면서 여기 있는 자를 외면할 때 그리고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갈 때 그것은 패밀리 테두리밖에 있는 것이 되고 여기 있는 자의 단호한 처벌을 받아야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벌이다. 비어있는 자리는 항상 채워져야 하고 넘쳐흘러 버린 자리의 가장자리는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한다. 마이클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행하는 작업들은 바로 이런 정리 작업, 바로 자신의 패밀리 테두리밖에 있는 자들을 청소하는 것이다. 그것의 시작은 돈 꼴레오네 바로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다.

 장례식장면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돈 꼴레오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 대해 먼저 얘기해보자. 돈 꼴레오네, 비토는 지금 자신의 손자와 놀고 있다. 아마 마이클의 아들일 것이다. 지금 돈 꼴레오네, 비토는 마이클의 자리를 대신해주고 있는 것이다. 돈 꼴레오네의 자리를 마이클이 대신하듯... 하지만 이때 우리는 대신하는 자리가 가진 잔혹한 성격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마이클이 진짜 Godfather로써 인정받는 것은 자신이 대부로 선 아이의 진짜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이다. 결국 대신하는 자리는 원래의 자리를 죽이고 그 자리를 기억하는 자들을 정리해 자신이 원래의 자리였음을 인정받고 공포하려는 것을 최종목표로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대신하는 자리에게 내려진 최후의 유혹이자 가혹한 숙명이기까지 하다. 그림자가 실재를 위협한다.

 

비토가 죽는 순간


 돈 꼴레오네, 비토는 마이클의 자리를 대신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 그리고 마이클의 아들은 주변을 떠돌다 그곳을 떠나고 그곳엔 죽은 돈 꼴레오네, 비토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남게 된다. 돈 꼴레오네, 비토는 마이클의 자리를 대신하지도 못하고 위협하지도 못한 채 죽어버리고 아이의 아버지의 자리는 비워진 채로 남게 된다. 케이, 마이클, 아들 마이클가정의 삼항 구조에서 마이클의 자리는 결국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 채 비워지게 되고 케이는 남편을, 아이는 아버지를... 그 둘은 그대로 비워진 채로, 비워진 그 자리를 짊어진 채로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돈 꼴레오네의 자리를 대신하던 마이클은 대신하는 자로써가 아니라 원래의 돈 꼴레오네로 인정받으면서 패밀리의 자리를 채우고 완성하게 된다. 우리는 자리를 채우고 완성한다는 것, 하나의 조직을 완전하게 완결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섬뜩한 것인지 이 영화를 통해 본다. 그것은 말 그대로 문을 닫고 벽을 세우고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어둠속에 가둬두는 것. 마치 마지막장면처럼. 그리고 그것은 케이와의 결혼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마이클의 아내자리를 그저 채우게 하는 것. 케이는 사실상 이탈리아에서 결혼한 시골여자의 자리를 대신하는 자일뿐이다. 그리고 끝내 케이는 원래의 자리에 가지 못하고 그저 대신하는 자리로 단절된 채 남게 된다. 마이클이 그녀의 시야에 벽을 세움으로써... 

 다시 장례식 장면으로 돌아오면 여기엔 죽은 돈꼴레오네, 비토의 애도가 없다. 그저 그가 죽기 전에 마이클에게 남긴 말만이 실천되고 있을 뿐이다. ‘바지니와 만남을 주선하는 자가 배신자다.’라는 말. 그리고 이 씬은 마이클의 시선에 의해 편집되고 있다. 마이클의 시선에 보여지는 것, 장례식에 참가한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 드러나는 권력의 이동관계. 그리고 마이클의 자리에서 어른거리며 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아버지의 말...그 말은 마이클의 눈이 되고 끝내 배신자를 찾아내게 된다. 

비토의 장례식 


왜 아버지는 죽지 못하고 끝내 여기에 붙들려 있는가? 왜 아들은 아버지를 놓아주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가? 조직은 아버지를 원한다. 아버지만이 실내와 실외, 조직과 가정 그 사이의 경계가 흐트러지지 않게 마치 댐처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라는 댐, 둑, 벽이 그 사이에 있기에 아들(들)은 아무 걱정 없이 자신의 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아들(들)은 아버지가 되길 원하지 않고 아버지가 항상 그 자리에 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 시간의 흐름, 외부와 내부의 변화를 피해갈 수 없다. 점점 쇠약해지는 몸. 하지만 아들(들)은 그런 아버지를 쉽게 놓아주지 못한다. 아들(들)은 그 경계에 서길 두려워하면서 계속 그 자리를 미루고 도망친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해서 아들(들)을 그 자리로 이끈다. 그래서 아들(들)이 선택한 방법은 죽은 아버지를 산 아버지를 대신해 그 자리에 놓는 것이다. 죽은 아버지는 유령처럼 아들(들)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게 된다.....


 

2부에서 계속....

2010/07/03 - [Film] - 대부(Godfather part1) 1972년 (2010년 디지털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