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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대부3 (GodFather Part3) 시대는 무대가 되고 인간의 육체는 배우라는 목소리가 된다.



제임스 칸(소니), 말론 브란도(돈 비토 콜레오네), 알파치노(마이클)존카제일(프레도)





대부3 : 시대는 무대가 되고 인간의 육체는 배우라는 목소리가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혹은 이 영화를 보고나서 펜을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막막함이다. 이 영화는 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고 무엇보다 써야 할 글이 없었다.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내용을 분석하고 인물의 심리를 분석하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글을 쓴다는 것일 뿐, 영화에 관해서는 아닐 것이다. 영화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영화로 관객을 안내하는 것이고 영화를 구성하는 벽(들) 즉, 쇼트(들), 빛과 어둠,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하나의 쇼트를 어떻게 형성하고 그다음 쇼트와 어떤 관계를 만드는 가? 쇼트의 경계에 대한 물음들. 인물과 내용 이전에 이 문제들이 영화에 관한 글쓰기의 핵심주제이다. 


대부1에서의 빛과 어둠. 조명의 대비. 그리고 쇼트가 만들어내는 실외와 실내의 경계, 공간의 차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대부2에서는 창문이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고 소통한다. 과거와 현재는 단순히 시간상의 이전과 이후, 연결이라는 의미를 잃고 단절로써 그 층을 달리하게 만든다. 할아버지와 손자를 연결 짓는 아버지라는 단절 아니 경계선. 왜냐하면 그 경계를 중심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의 시간이 서로 접히기 때문이다. 단지 창문을 바라봄, 다시 말해 인물이 쇼트너머를 응시하는 것만으로 두 시간적계기가 만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인물의 말 한마디가 기호가 되어 다른 인물의 기억 속에 무의식처럼 웅크리고 다른 시간에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한가? 대부1에서의 쇼트의 경계, 흐름의 단절은 공간의 경계와 단절을 의미했다면 대부2에서 쇼트의 경계는 시간의 흐름을 끊어 두 개의 시간을 서로 다른 층에 겹쳐놓음으로 하나의 시간 안에 미세한 변화를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오직 영화적인 세계, 쇼트가 형성되고 이루어내는 규칙들. 그곳을 안내하는 자가 바로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3는 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기엔 쇼트의 단절도 경계도 느껴지지 않는다. 쇼트는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갈 뿐...우리는 그저 그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서 쇼트는 사고를 촉발시키는 기호로써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눈으로 보고 이야기를 쫓아 따라가면 된다. 공간을 나누지도 시간을 나누지도 않는다. 쇼트는 이야기에 종속되어 흘러갈 뿐이다. 영화는 더 이상 안내인을 필요치 않는다. 그것은 화려하고 잔인한 축제가 끝난 뒤 오는 허무와도 같다. 만약 이 영화가 안내인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쇼트로 구축되어진 영화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영화의 또 다른 세계, 배우의 육체가 고스란히 담기는 영화의 세계에서 일 것이다. 


대부3를 보고나서 단순히 장면분석에 매달리는 건 대부1,2를 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대부3를 대부1,2와 같이 하나의 텍스트로 놓고 분석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하더라도 아마 풍부한 텍스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오직 대부3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니크한 점을 놓치게 될 것이고 그것은 너무 불행한 일이다. 대부3에서 정말 중요한 건 영화는 결국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배우의 육체를 담는다는 것이고 그 육체가 어떻게 역할이라는 목소리 즉 이미지가 되는가이다. 하나의 캐릭터가 한명의 배우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나이에 의한 주름(비록 분장일지라도 우리는 대부1,2를 거쳐 대부3에 도착했기에 마이클의 시간은 알파치노의 시간과 겹쳐진다.)과 그것이 표현해내는 역사성이 카메라에 담긴 영화는 그리 흔치 않다. (내가 알기론 없다.) 대부3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것이다. 장면분석은 대부1,2만으로 충분하다. 대부3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와 역할간의 관계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마치 代父대부가 아닌 代役대역, 현실의 삶을 대신사는 배우에 관한 영화이다. 



삶에서 우리는 누구를 대신하는 역할을 맡은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답하는 순간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운명처럼 그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라는 무대에서 오직 삶으로만 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극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다. 영화의 도입부 폐허가 된 마이클의 저택은 잔혹한 가족사를 간직한 채 시간의 강물과 먼지 속에 잠긴 하나의 무대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위로 드리워지는 마이클의 목소리는 그 무대로 이미 사라져 버린 인물들을 다시 부르는 것 같다. 그렇게 영화는 다시 시작한다. 마이클을 연기했던 알파치노, 케이를 연기했던 다이안 키튼, 코나를 연기했던 탈리아 샤이어.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대부1에서부터 지금 대부3까지 그 역할과 함께 살아온 배우의 얼굴에 남긴 주름. 1972년의 대부1, 1974년의 대부2, 1990년의 대부3. 영화 속의 인물, 다시 말해 영화 속의 이미지가 그 역할을 맡은 살아있는 배우와 같이 늙어가면서 연기를 하지 않아도 얼굴에 새겨진 주름에 의해, 몸에 익은 습관들에 의해, 배우 그 자체로 영화 속 인물이 되어버리는...대부3는 대부1,2를 지나오면서 살아남은 인물. 그리고 그 역을 맡은 배우의 늙어가는 육체를 고스란히 담은 노력이다. 


영화는 배우의 내면, 감정이전에 시간과 함께 배우의 육체에 하나하나 새겨진 주름을 찍는 것이다. 글로써 그 주름, 배우의 육체를 써내려가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쓴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여러 단어들과 관념적인 말들을 빌려와야 할 것이다. 주름은 눈에 보이지만 그것이 형성되고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글로 담아낼 수 없다. 아니 담아내기엔 나의 글재주, 내가 알고 있는 어휘들, 문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래서 글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자주 끊김을 느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려야 하기에 계속 글을 써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3는 미키루크가 주연한 ‘더 레슬러’라는 영화와 비슷하다. ‘더 레슬러’가 미키루크라는 배우의 육체를 고스란히 담아내 미키루크라는 배우의 역사와 ‘더 레슬러’의 캐릭터와 고스란히 겹치게 했다면 대부3는 대부1,2를 찍고 대부3에 도착한 알파치노, 다이안 키튼, 탈리아 샤이어등 배우들의 육체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것은 배우가 어떤 인생역정을 겪었느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알파치노가 대부를 연기하기위해 대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말이지 우스운 질문이다. 그리고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배우가 어떤 역할을 맡기 위해 실제 그 역할을 인생에서 산 사람을 찾아가 조언을 얻거나 실재 그 삶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카메라가 할 수 있는 것은 배우의 연기를 찍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육체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3에서 마이클의 역할과 알파치노의 삶이 같이 겹친다는 것은 알파치노가 마이클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알파치노가 살아온 시간들이 마이클이라는 역할에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알파치노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여기선 단지 그가 살아오고 견뎌온 시간 그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 그 시간동안 알파치노에게 일어난 개개의 사건들은 이 시간 앞에 의미를 잃어버린다. 그저 거대한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할 뿐이고 이 시간에 의해 마이클이란 캐릭터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은 온전히 알파치노라는 육체와 함께 살아왔다. 그것이 대부3가 가지는 의미이다. 마이클의 아들, 안소니가 오페라가수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에서 아니 하나의 극에서 배우가 어떻게 그 역할을 창조하는지에 대해 담고 있다. 안소니가 패밀리 안에서 살아오면서 보아왔을 하지만 보지 말아야했을 사건들,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복수라는 순환. 그것을 끊기 위해서 복수는 하나의 극이 되어야 했고 그 속에서 배우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고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던 진정한 신의 의도일지도 모른다.(글을 쓰는 지금 만약 대부4가 나온다면 아마 엔터테이먼트의 문제를 다룰 것이란 느낌이 든다.)예술은 삶의 잔혹성을 대신 껴안고 죽으리라.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도 같은 희생을 의미한다. 안소니는 패밀리 안에서 피할 길 없는 복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배우가 되기로 한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겪은 사건을 극화하여 그 안에서 그 사람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연극이 현실을 대신하고 현실의 복수와 죽음은 연극의 복수와 죽음이 된다.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 복수와 죽음을 겪어야하는 인간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배우를 바라본다. 대부가 신을 대신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역할을 맡았고 그것이 현실이라는 영역에서 실행되었다면 대부3에서는 신의 죽음이 선언되고 연극은 현실을 대신하고 배우가 인간을 대신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페라라는 극을 통해 현실 속에 우리가 타인에게 던지는 말들, 명령을 내리는 말들, 의미작용으로 행동을 촉발시키는 말들은 노래로 바뀐다. 말이 가진 의미작용, 행위들을 멈춰 세우는 하나의 노래, 목소리로 바뀐다. 여기서 수많은 의미를 담아 무거워진 말과 행동은 모든 것을 잃고 가벼워진다. 


대부3가 이루고자하는 건 결국 안소니의 목소리와 마이클의 절규이다. 극 안에서 모든 의미작용을 잃고 아름답게 솟아오르는 안소니의 목소리와 현실에서 자신의 모든 의미였던 딸, 소피아를 잃고 외치는 마이클의 절규. 그것은 또 하나의 극인가. 마이클이 의자에서 쓸쓸히 죽어갈 때 바라본 마지막 오페라인가. 예수가 죽고 부활한 안소니의 오페라무대, 딸의 죽음 그 앞에서 오열하는 마이클이 있는 극장 앞 계단이라는 무대. 노년의 마이클은 선글라스를 낀다. 화면 구석에 초라하게 앉아있는 마이클. 주위엔 두 마리의 개들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서성이고 있을 뿐 아무도 없다. 그는 결국 무너진다. 쓰러진다. 선글라스와 모자 역시 떨어진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의미를 잃고 그를 둘러싼 세상은 하나의 의미를 얻는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상이 주고받는 거래방식. 대부3가 의도하는 건 대부시리즈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대부1,2를 패러디라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버지와 딸이 춤추는 장면, 조니 자자를 살해하는 장면(대부2에서 돈 파누치를 살해하는 장면과 겹친다. 하지만 그때는 축제가 계속 진행되었지만 지금은 축제는 중단되고 성모마리아상은 깨진다.).대부1에서 말한 시대의 변주, 대부2에서 말한 시대의 변화 그것이 곧 의미화였다면 대부3에서 무대가 되어버린 시대는 바로 무의미화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있다. 그것이 진실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내는 의미가 아닌 진실한 의미. 그것은 인간의 모든 의미화노력을 좌절시키고 파괴시켜버린다. 그리고 오직 파괴된 의미, 무너진 의미, 무의미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고 그것을 바라보게 만든다. 진실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라 붙일 것이다. 



 인간은 사유하기 위해서, 자신이 느낀 걸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단어와 이름, 말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붙여진 이름 ‘신’...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던 공간이 그저 텅 빈 채 폐허로 다가왔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 그리고 그 위로 흐르는 가족을 부르는 마이클의 목소리이고 편지일 것이다. 죽음이 휩쓸고 간 자리, 살아남은 자는 죽음을 짊어진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유령처럼 머물러 있다. 마이클을 끝내 붙잡고 떠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죄 값을, 그는 떠나기 위해서 가족들을 다시 불러 모은다. 그리고 자신이 믿었던 카톨릭의 대주교가 배신할 때 그리고 교황청마저 경제적 논리에 의해 지배될 때 그는 자신의 믿음(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패밀리로 대변되는 믿음)을 의심한다. 아니 그는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던 그의 믿음. 하지만 시간은 가족이라는 의미역시 무의미하게 만든다. 동시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그렇다고 자신을 정당화시키게 만든 믿음마저 무의미하게 만든다. 마이클의 모든 노력을 좌절시키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것은 대부3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빈센트와 소피아의 친척간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대부1,2에선 남녀 간의 사람, 멜로적인 코드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여성의 비중이 작았다. 부각되었던 것은 어머니, 여성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남성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늘에, 딸은 아들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3에선 여성의 역할이 부각된다. 여동생 코나는 어머니, 아내이기 보다 아버지에 더 가깝다. 그녀는 마이클과 대등한 축을 형성할 정도로 영향력을 가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이클에게서 모든 의미를 빼앗게 만드는 것은 ‘소피아’ 자신의 딸, 여성의 죽음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자신을 대신해 죽은 이탈리아 시골여자의 운명에 자신의 딸을 오지 못하게..자신의 딸이 그 여자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노력이다. 


 마이클이 빈센트에게 했던 말 ‘적은 네가 사랑하는 자를 먼저 노린다’ 그리고 대부로써 자신의 권한을 빈센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자신의 딸, 소피아를 포기하라는 말. 근친상간, 그것은 절대 안 된다. 하지만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신을 대신해 딸은 죽는다. 자신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대신해 죽는 것이다. 그저 아버지에게 빈센트에 관해 묻고 싶어서 다가갔을 뿐인데...죽음. 그리고 절규. 그것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적은 네가 사랑하는 자를 먼저 노린다. 그때 마이클에게 적은 이 모든 걸 주관한 신인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을 데려가 버리는 잔인한 신이여. 생의 끝에선 결국 홀로 죽음을 맡게 하는 신이여.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고 눈 감을 수밖에 없는 신이여. 안소니의 목소리가 축복하는 신과 마이클이 저주하는 신은 같은 신인가. 대부1,2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자리라는 개념. 아버지의 자리는 여기서 무의미하다. 옮겨가는 자리,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순환하는 자리, 자리는 여기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자리만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아는가? 신의 말을 전하는 자가 신인가? 신의 옷을 입은 자가 신인가? 만약 신의 말을 전하는 자가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기업가라면, 신의 옷을 입은 자가 자신을 죽이는 살인청부업자라면...신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내려진 상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결국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의미가 사라지는 순간, 사랑했던 모든 것마저 사라지는 순간, 신을 향한 저주어린 절규의 순간. 그래서 인간이 사고하기위해 이름붙인 신이란 마저 그 의미를 박탈당할 때 우리가 부정했던 의미, 사랑, 신이란 단어는 단번에 그 의미를 되찾을 것이고 오직 하나의 목소리로 울러 퍼질 것이다. 시대는 무대가 되고 인간의 육체는 배우라는 목소리가 된다. 그리고 인생은 오페라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