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 허우 샤오시엔 (1947년 4월 8일 중국)
영화의 탄생
뤼미에르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가자. 영화의 탄생. 첫 시선으로 돌아가자. 이 말은 뤼미에르가 영화를 처음 찍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뤼미에르이전에 영화를 찍은 사람들이 영화사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사실은 알 수 없다. 사실은 우리가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 이미 지나가버리고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물질은 기억이 되고 사실은 역사가 된다. 이때 뤼미에르라는 이름은 특정인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인물과 독립된 하나의 단어, 기호로써 영화의 시작을 상징한다. 뤼미에르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가자. 왜 우리는 영화를 찍는가? 영화를 찍는 이유, 영화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 오직 이 물음만이 우리를 영화의 시작으로 안내해 줄 것이다.
오귀스트 뤼미에르, 루이 뤼미에르
영화의 탄생. 그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본과의 결합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되지 못하고 원인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결과로써 벌어진 현상이다. 우리는 언제나 결과로써 주어진 현상들에서 무언가 있음을 짐작하고 원인과 이유를 짚어낸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결과를 계속해서 덧붙여 나갈 뿐..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든다. 원인 혹은 이유는 점점 멀어진다. 영화가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본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영화는 그것의 산물로써 태어났는가? 다른 그 무엇이 아닌 왜 영화가 태어났는가? 그 한 가운데 인간의 욕망이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기계가 탄생하고 우리는 또 다른 세계를 접한다. 그리고 자본이 여기에 결합된다는 사실 그것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원한다는 것을 말한다. 자본은 대중이 원하는 것에 따라 움직인다. 혹은 대중이 그것을 원하게끔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우리는 영화를 원한다. 그것이 근원적인 이유이다. 물론 뤼미에르의 열차의 도착이 보여 질 당시 아직 영화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우리는 영화를 원한다’는 말을 그때 당시의 말로 바꾸면 아마 ‘우리는 보길 원한다’일 것이다.
영화의 시선
그러면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세상을 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길 원하는 것인가? 나는 이 물음이 영화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가 탄생하게끔 인간의 욕망을 작동시킨 물음이라 생각한다. 바라본다는 것은 삶의 중단을 뜻한다. 오로지 중단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흘러가는 삶을 중단시키고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세계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삶을 중단시키고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욕망하다라는 말은 표현하다라는 것을 뜻한다. 영화를 찍는 것을 욕망을 표현이라 말하기도 한다. 뤼미에르가 열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을 때 그때 찍힌 기차라는 이미지는 더 이상 우리가 타고 다니는 일상속의 삶속의 기차가 아니라 무언가의 표현으로써의 기차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의 기호를 얻게 된다. 기호를 얻는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다른 무엇을 사유할 수 있는 발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무엇은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은 그래서 이름붙일 수 없었던 오직 느낌 혹은 감각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
열차의 도착 (1895년 그랑카페 in 프랑스, 파리)-최초의 영화
우리는 영화를 통해 이런 느낌과 감각을 바라보고 이름붙이고 사유할 수 있는 발판을 얻게 된다. 기차는 더 이상 우리가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기를 멈추고 무언가의 표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일상 속을 살아가던 기차는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 죽음을 체험한다. 그것은 쓸모없음, 도구로 존재하길 그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이 필름 면에 새겨진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스크린위에 되살아 날 때 무언가의 표현으로써 기차가 된다. 기차는 이미지로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때 당시 열차의 도착을 보던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심지어 경이로워한 이유이다. 단지 현실에서 보던 기차가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옴에 따라 느끼는 위험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정말 안일한 생각일 뿐이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의 놀라움 다시 말해 영화가 주는 놀라움은 현실과 유사함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겪었던 것들을 새로운 차원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뤼미에르의 열차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타고 다닌 열차가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는 열차이다. 바라보는 열차는 타고 다니는 열차를 지시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는 열차이다. 우리는 이것을 열차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한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열차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는 오직 보이는 것들의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 걸 볼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마음으로 본다라는 말을 경계해야한다. 적어도 당신이 영화를 보길 원한다면...마음이 무언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소리로 볼 수 있고 촉각으로 볼 수 있고 냄새로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는 오직 보이는 것들의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를 체험하라!
우리는 아직 더욱더 많은 감각기관들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은 이런 감각기관들을 원한다. 그것은 결국 공간과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 단지 그 대상이 놓여있는 시간과 공간을 체험할 뿐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인물을 바라볼 때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머물러 있는 시간과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카메라는 방안으로 계속해서 되돌아오지만 그 안의 인물들은 바뀐다. 카메라는 정지된 공간속을 바라보고 바뀌는 인물들에 의해서 흘러가는 시간을 체험한다. 그리고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인물이 움직이는 동선에 의해 우리는 인물이 있는 공간을 다시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선 인물이 어디로 프레임아웃하고 인하는지, 인물이 공간의 어느 위치에 있는 카메라에 대해 등지고 있는지 앞을 보고 있는지 옆을 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동시에 이미지가 소리로 보여 지는지 시각으로 보여 지는지 중요하다. 또 관객이 바라보는 것, 인물이 바라보는 것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는 전화벨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전화기에서 나오는 상대방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우리가 듣는 건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이다. 그 소리를 통해 상대방의 말을 시각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인물이 머무는 공간은 동시에 인물을 대변한다. 그것은 마치 인물의 몸과도 같다. 그들을 대변하던 집은 혹은 방은 더 이상 그들을 대변하지 못한다. 가족은 흩어졌고 서로 집 역시 따로 떨어져 있다. 부모님의 집에선 자식이, 자식의 집에선 부모님이 이방인이다. 부모님은 더 이상 자식에게 길을 제시해 줄 수 없다. 자식은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집에 머물지 않고 전철을 따라 카페를 찾아 머물고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친구를 만나기를 원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잘 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보기만 하면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전에 쇼트와 쇼트가 만나 이야기를 형성하기 이전에 하나의 쇼트로만 세계가 완벽하던 초창기영화에서 처럼 잘 보라고 하고 있다. 인물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 인물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리고 인물이 있는 공간은 어떤 모습인지, 인물이 소리로 보이는지 시각적으로 보이는지...등등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숏바이 숏을 하듯 글로 다시한번 써본다. 쇼트와 쇼트가 연결됨에 따라 만들어진 이야기에 익숙해진 우리는 이야기에 빠져들어 정작 그 이야기를 산출한 쇼트와 쇼트(혹은 그 연결점)는 보지 못한다. 이 영화는 친절하게도 쇼트와 쇼트사이 간격을 둠으로써 쇼트를 바라보게 해준다. 우리는 이 영화가 마련해준 간격에 머물러 쇼트를 바라보면 된다. 나는 좀 더 잘 바라보기위해 글로 다시 써 보는 것이다. 영화를 바라볼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글로 쓸때 보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바라봄의 중단을 뜻한다. 나는 말 그대로 <카페 뤼미에르>라는 영화를 글로 써본다. 다음에 쓰여 지는 것은 영화평이 아니라 카페뤼미에르를 글로 다시 한 번 만들어보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카페뤼미에르를 체험하는 방식이다.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이 영화를 체험할지 궁금하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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