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본 내용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대부분 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반전이 있기에 못보신 분들은 읽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반전영화에 반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스포일러가될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은..
뭘 모르고 하시는소리....반전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반전을 인지하고 다시볼때 생기는 것입니다.^^
BUT...............
이 영화 역시 매력적인 남녀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자주인공은 청각장애인으로 등장한다. 인물들이 사랑을 나눌 때 장애 혹은 사랑을 가로막는 것들은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애절하고 강렬하게 만든다. 그래서 죽음 또는 병, 장애는 멜로영화에 있어 자주 등장한다. 물론 나중에 밝혀지지만 두 여자 중 한명은 장애가 아니다. 멜로영화가 반전을 행할 때 이상하게 나는 그 영화가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다른 장르보다도 멜로장르는 감동코드와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떤 장애와 부딪혀서 만들어내는 이별, 그때 비어지는 쓸쓸함. 혹은 청춘멜로에서 보여 지는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들은 삶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준다. 진실한 감동은 과잉된 눈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여백, 비워진 뒷모습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멜로가 반전을 행할 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스스로 포기한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영화의 반전 역시 내게는 불순하게 느껴진다. 아마 사람들은 청춘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파고들 필요가 있나 물을 것이다. 나 역시 거기엔 동의한다. 아마 이 영화를 만든 사람 역시 단순히 감동적이고 좀 더 극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이 영화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라 결국에는 이 영화에서 느낀 이상한 감각을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나는 거기에 덧붙여질 비판들을 미리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니 좀 더 들어 주길 바란다. 나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먼저 보았다. 언니와 동생이 있는데 언니(샤오펑)는 청각장애인수영선수로 나와 있었다. 그때 난 당연히 그녀의 동생(양양)은 청각장애인이 아닐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주인공(티엔커)과 수영장 앞에서 대화를 나눌 때 서로 수화를 했었고 중반이후까지 둘은 그렇게 대화를 나눈다. 물론 티엔커는 혼잣말도 하고 부모님과도 대화를 나누기에 청각장애인이 아님이 밝혀진다. 사실 세주인공 모두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할 경우 영화를 이끌고 나가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무엇보다 관객을 몰입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양양은 계속해서 수화를 하기에 마치 청각장애인인 것처럼 보여 진다. 아마도 감독은 반전보다도 청각장애인이라는 편견을 관객 스스로 인식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설정으로 했을 수도 있다. 왜냐면 양양이 관객에게 청각장애로 보이는 건 양양의 대화상대가 모두 청각장애였기 때문이다. 언니도 청각장애고 그녀가 좋아하는 티엔커 역시 그녀는 청각장애로 오인한다. 그래서 둘은 서로가 당연히 청각장애인인줄 알고 수화로 의사소통한다. 감독은 이런 설정을 통해 청각장애라는 편견을 깨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서로가 잘못 생각한 것 이였고 두 명 다 정상인이 였음을 알고 청각장애라는 설정이 반전코드와 결합할 때 청춘영화가 보고 싶어 하지 않은 혹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무마시켜버리려는 치명적인 기만이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순간 청각장애를 가진 언니 앞에 정상인의 사랑은 면죄부를 얻기 때문이다. 장애인 앞에서 정상인이 사랑을 나누는 게 무슨 죄인가? 그것은 오히려 장애인을 더욱 기만하게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정상인은 마치 장애인 앞에서 죄를 진 것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고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그것이며 반전은 면죄부로써 이용된다. 이 순간 내가 묻고 싶은 건 바로 면죄부라는 개념이다. 동생 양양은 언니 샤오펑이 꿈을 이룰 수 있게끔 현실적인 문제를 자신이 다 감당한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설정일 따름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양양이 일반적인 아르바이트를 했을 경우 같이 일하는 동료나 손님에 의해 자신이 청각장애가 아님이 관객에게 자연스레 밝혀지기 때문이기도 하다.)아버지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 있고 돈을 얼마나 보내오는지도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양양이 일하는 장면은 거리공연뿐인데 과연 그걸로 생활을 꾸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양양은 언니 샤오펑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지만 사실 그것은 어떤 죄의식에 가깝다. 이 죄의식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해 그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가질 수 있는 죄의식과도 같다. 할 수 있는 자가 못하는 자에게 가지는 죄의식. 잔인한 얘기지만 이 영화는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 역시 이런 죄의식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결국 이 죄의식은 용서되고 거짓구원은 실행된다. 결국 정상인이 바라는 건 장애인이 가진 장애에 대해 아무런 잘못도 책임도 없다는 확인이기 때문이다. 정상인이 바라는 건 평등이라기 보단 이런 확신이다. 같은 사회구성원이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확인서에 도장을 받는 것.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반전이 무서웠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하는 얘기는 양양이 말을 하고 난 뒤가 아니라 하기 전까지 성립하는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 영화의 시작은 무척 새로웠다. 세 명의 주인공중 두 명을... 그것도 사랑하는 두 남녀가 서로 만날 때 말을 하지 않고 수화로 대화를 해야 하는 설정은 새로운 시도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사랑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무척이나 많은 제약을 가진다는 것이고 관객에게 그 감정을 전달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제약을 가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물을 이렇게 설정하는 순간 좀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인물이 말을 하기 그칠 때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소음이 들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성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성영화를 보고 있다. 하지만 인물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건 그들을 둘러싼 세상의 소리이다. 무성영화라면 인물의 소리와 함께 세상의 소리도 꺼졌겠지만 유성영화이기에 인물의 소리만 꺼진 것이다. 그 대신 인물의 표정, 몸짓과 함께 세상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마치 표현의 다른 방식 같다. 이 영화에선 젊은 세대들의 다양한 표현방식들이 보여 진다. 자전거로 자신을 표현하고 음악으로 표현하고 메신저로 소통하는 세대들. 그때 그들에게 의사소통이란 단지 말을 통한 것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그 도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영어제목 ‘hear me'는 의미심장해 보인다. 나를 봐달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달라고 얘기한다. 여기서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 보이다와 들리다. 인물은 말을 잃고 그 모습만 보인다. 그리고 세상은 말을 한다. 마치 현상되지 않은 네거티브필름과도 같다. 그럼 이 문장을 현상시켜보자. 과연 어떻게 변할까? 인물은 말을 하고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은 침묵한다. 이때 인물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들리게 된다. 그렇게 이 영화의 영어제목 hear me는 성립한다. 내가 서두에서 말한 이상한 감각이란 바로 인물이 침묵할 때 들리는 세상의 소리이다. 이것은 인물이 인위적으로 침묵해서 듣는 소리가 아니다. 아니 정작 인물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상대방의 모습에 집중해 있기 때문이다. 이 소리를 듣는 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이다. 인물의 모습 위로 언어처럼 스며드는 세상의 소리들. 이 순간 모든 것은 표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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