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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중력 피에로, 삶이 즐거우면 중력에서 자유롭다.



1. 곤충과의 대화

뉴스에선 곧 모기가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예언한다.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미래는 이미 내겐 현제진행형이 된다. 뉴스는 스포츠 뉴스로 넘어가고 곧 이어질 예능 프로그램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휴식을 갖는다. 그리고 지금 TV앞에서 별달리 할게 없어 귀찮게 구는 모기를 죽일 방법을 생각해 낸다. 너희들은 사실상 사라져 버려도 생태계에 별다른 지장이 없지 않은가. 라고 되뇌인다. 모기 하나 죽인다고 살생을 했다며 밤잠을 설치기 보단. 많이 죽일 수록 두다리 잘 뻗고 잘 수 있는게 바로 모기다. 살충제, 액상모기, 전자모기 등등의 병기를 옆에 두고 말이다.

 여기 꾀 근사한 물건이 하나있다. 지난주 아버지께서 사오신 전기 모기체를 사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이것의 장점은 손을 더럽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감전 될때 들리는 전기 충격 소리가 깜짝 놀라 눈이 부실 정도라 확인 사살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모기체를 찾으려는데 보이지 않는다. 이 잡듯이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난 분명 어제 아버지께서 모기체를 만지시는 걸 봤다.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을 하실때 들고 나가시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고.) 결국 모기체를 이용하길 포기 한다. 그 사이 모기는 이미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으로 숨어 버렸다. 녀석은 해가 지고 불을 다 끄고 내 잠자는 숨소리가 들릴 때즘 천천히 접근할 것이다. 난 벌써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다.

 그때 마침 부얶 식탁 밑에 미쳐 치우지 못한 과자 부스러기를 둘러싸고 개미들의 한판 노동이 시작된다. 그들의 수는 모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냥 두기로 한다. 그럼으로 과자 부스러기 치워주는 수고를 덜수 있고. 나한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물을 한잔 따르려는데 문득 개미들이 전부 일을 하는 게 아니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난 물을 마시려다 말고 수십마리중 농땡이 치는 개미들이 있을까 확인하고 싶어진다. 머리를 식탁 밑으로 집어넣고 엎드려 그들을 관찰한다. 개미들은 부스러기를 열심히 살피고 들고 갈 수 있는 크기의 것들을 골라낸다. 그리고 몇몇 개미들은 자기 몸집의 절반 만한 걸 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때 그 뒤를 따르는 무리가 보인다. 세마리....먹이를 나르는 개미 주변으로 세마리의 개미가 졸졸 따라 다닌다. 앞서가던 개미가 잠시 멈춰서면 뒤 따르던 개미도 잠시 멈춰선다. 그리고 그들은 벽과 마루바닥 사이의 틈세로 사이 좋게 기어들어간다. 

이들을 그대로 살려줄려면 나만의 노력으론 불가능 하다. 어쨌든 식탁 밑에서야 살수 있었겠지만 식탁 위로 올라온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할 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 차라리 멀리 못나오게 그 틈세 사이에 과자부스러기를 만들어서 깔아준다. 그리고 듣던 말던 한마디 해준다. 너희들은 프랑스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빚을 지고 있어. 그래서 살려주는 거야. 라고 말을 했지만 곧 처량한 기분이 엄슴해온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백수자식아 일이나 해라! 난 그 길로 약국에 나가 개미약을 사와서 설치를 한다. 그들은 내가 설치한 개미약을 먹이인줄 알고 들고 갈테고 곧 여왕개미와 즉사할 것이다. 집단 사망 테러 난 아무렇지도 않게 단 돈 오천원으로 그짓을 자행했다.   


2. 중력 피에로

삶이 딱히 즐겁지가 않아서 일까. 하는 모든 일들에 삐딱한 시선으로 바가보기 일수다. 이럴 때는 언제나 그랬든 성질을 영화로 달래는 수 밖엔 도리가 없다. 역시 그 선택은 언제나 섬세하게 요목 조목 따져가며 골라야 한다. 배우와 감독과 시놉시스를 미리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간혹 먼저 봐주신 관객들의 평점은 부가적으로 참고한다. 이렇게 선택된 영화가 <중력 피에로>다.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감독은 전작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은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 비범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한 마디로 잘 찍었다. 

1.
이 영화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일본 가정의 유대에 관한 이야기다. 시청에서 일하는 아버지가 우연히 폭설이 내린 도로에 갖히게 되고 도움을 구하던 모델 출신인 어머니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하게 된다. 그들은 아들 이즈미를(카세료) 낳고 행복하게 지내지만, 어느 날 고등학교 성폭행 범에 의해 어머니는 임신을하게 되고 고민 끝에 아이를(오카다 마사키) 낳기로 결심한다. 아이의 이름은 봄이라는 뜻으로 '하루'라고 지어준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죽게 되고 장례가 있던 날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그들이 배다른 형제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다할 흔들림이 없이 반아들인다. 

2.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어느날 동네에 연쇠 방화가 일어나게 되고. '하루'는 아르바이트로 벽에 낙서가 된 그레피티를 지우는 일을 하는 와중 방화 지점과 그레피티가 발견된 지점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마사키는 이 사실을 이즈미에게 알려주고 범인을 잡기위해 나서지만 실패한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고 유전공학이 전공이었던 이즈미는 그레피티에 DNA염기 서열을 순서로한 메시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과거 어머니를 성폭행했던 범인이자 하루의 아버지가 다시 그들이 사는 동네로 돌아온다. 이즈미는 돌아온 성폭행 범과 하루의 관계를 생각하며 고민하던 중 사실은 방화범과 그래피티를 그린 사람이 동일인물이며 그가 '하루'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하루는 자신의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고자 했던 것이고. 형을 그 일에 불러들이고자 꾸몄던 것이다. 성폭행 범이자 하루의 아버지는 예전 어머니가 성폭행 당했던 집으로 유인하고 그곳에서 마지막 방화를 저지르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영화는 끝이 난다. 

정리가 좀 어설프지만 이것은 시간순으로 스토리를 나열한 것이다. 2번의 이야기가 현제의 메인 플롯이고 1번의 이야기는 과거의 사건들로 메인 사이사이에 회상장면으로 들어가 감정을 첨예하게 컨트롤 한다. 방화법을 잡아내는 스릴러 형식을 차용하였고 초반의 형제애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인 회상이 붙음으로 가족애로 번지며 성폭행 사건을 통해 사회적인 시선을 다루다 결국 인간의 삶의 문제도 되돌아 오고 마지막에 가서는 ....... 
마지막이 중요하다. 이 한 씬에 모든 것이 응집되어 있다. 


하루: 엄마 저사람 떨어질 것 같아.


엄마 : 괜찮을 거야.


사회자 : 성공했습니다.


엄마 : 그의 얼굴을 봐 하루 그가 충분히 즐기고 있다면 떨어지지 않을거야.
그리고 떨어지더라고 그는 괜찮을 거야.
이즈미 : 어떻게?
아빠 :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중력에서 자유롭거든.


     
엄마 : 그러니까 곧 우리는 하늘에 떠오를 지도 몰라.


3. 윤리적으로 올바른 영화

  난 영화를 보는 내내 그래서 왜 중력 피에로가 제목이 된 것일까 궁굼해 하던차 감독은 엔딩 씬에 위와 같은 장면을 집어 넣는다. 실로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씬이이다. 엄마와 아빠의 대사 내용만 봐도 사실적이라기 보다. 동화책 속에 나오는 부모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시적인 표현으로 아이들에게 말한다. 과연 아이들이 이 말을 알아들었을리 만무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말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전하는 말로 들린다. 인생을 즐겨라! 그렇다면 중력에서 가벼울 것이다 라는 말은 이들 부부가 늘 가지고 살아가던 좌우명이 었던 것이다. 어느 누가 성폭행을 당해 낳은 아이를 자신의 자식처럼 아낄 수 있을까. 이것은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녀에겐 선택을 할 수 잇는 기회가 있었다. 아이를 지우면된다. 그리고 깨끗이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 씨를 씻어내고 지운다고 하여도 과연 그녀는 온전히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아이를 낳고 입양을 보낸다던지 보육원에 맏긴다던지 한다고 씻어질까? 아니다. 감독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속에서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해 찾길 바라는 것이다. 

사랑..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 만큼 세상에서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 있다면 이 영화는 그 말을 몸소 실천해 낸다. 죄를 혹은 아픈 과거의 기억들을 지우려고 하거나 씻어내는 것은 불가능 하다. 아마 꿈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평생 망령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우린 그것을 버리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감싸 안아야 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환의 고리 속에 즐거운 삶속에 아픔과 죄를 초대하라는 것이다. 그러는 순간 우리의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영화는 그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