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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카페 느와르>를 보고 쓴 씨네필 다이어리

 

이 글은 전적으로 카페느와르의 리뷰가 아닙니다. 
제목에서 보듯이 일종의 한탄 섞인 일기입니다.


 요즘 들어 영화를 보는 관점이 뒤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어떤 영화를 봤을 때 난 이 영화가 후지며 과잉으로 가득 찼으며 굳이 만들어질 필요가 없는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평단이..관객이..혹은 둘이 동시에 환호하기 때문이다. 뭐가 문제일까?

감상의 차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쨌든 감상의 발화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유하지도 글도 써낼 수 없는 영화들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인셉션 같은 예외도 존재하지만... 유독 한국의 영화가 자본과는 달리 감독의 실력에 작품의 편차가 심해지고 있다...편차가 심해 질 수록 관객은 코미디영화보다 개콘이나 무한도전을 더 찾게 되고 있고. 멜로영화보다는 주말 연속극에서 외로움에 대한 만족을 찾게 될 것이다.... 극장에 갈 이유가 없어지고 있다. 극장이 존립하고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그렇다면. 전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여흥과 엔터테인의 기능만 남게 될 것이다. 어두운 영화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여기 <카페느와르> 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도 하고 싶은 말이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환호를 보내는 이상기류. 그리고 평론가들이 하나같이 쓴소리를 내밷지 않은 이 상황...에 섬득해 하며... 혹시! 정성일. 그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되어지는 것은 아닐지 의심하게 된다... 만약에 누군가의 말처럼 이 영화가 정성일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제목에서 보듯 세계소년소녀중 문학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만들었다면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이 영화는 대한민국 최고의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만들었기에 그냥 넘어 갈 수 없는게 사실이다. 난 이 영화가 크랭크인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엄청난 환호를 보냈으며. 연줄이 닿지 않아 그의 연출부 혹은 제작부에 참여 하지 못한 것에 무척 한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그를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기에 피해갈 수 없이 영화 하나만 두고 얘기 하지 않으련다.
 

 난 예전에 4년 전 졸업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와 같은 스타일의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시도는 같았다 일종의 '쇼크' 이 작품은 전공자들은 무척 좋아했지만 일반인들에겐 무리수를 두는 영화였다. 관객과의 대화시간 아이를 안고 온 주부가 내게 물었다. 재미있게 봤는데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잘 안 잡힌다고 그때 난 웃으면서 말했다. 작품을 제대로 보셨습니다. 이 영화는 비 내러티브를 지향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감상하는데 이야기라는 요소를 제거하면서도 성립할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해보는 영화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분은 할 말을 잃으셨다. 아마 내말에 모욕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기도 하다. 의도를 조금더 겸손하게 설명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난 그렇지 못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한것 처럼 큰 성취감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카페느와르>...먼저 이 영화를 본 어떤 선배가 문자를 보내 왔다. 내가 만들어온 영화와 유사한 지점이 많이 있다고. 카페느와르를 아직 보지 않은 난 순간 뜨끔했다. 정성일의 글을 읽으며 영화를 시작했고 그가 쓴 글을 보며 밤잠을 설치며 고민했던 자신을 들켜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부끄러움 이었다.


 당시 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어 가면서. 꿈과 실제의 혼돈에서 파생되는 자아분열. 영화와 현실의 통합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감각. 숏과 씬의 강렬한 충돌 그리고 이미지의 나열과 반복. 어디서 본 듯하지만. 낯선 인물들의 행위 그리고 대사. 시대와 공간의 불분명함. 그리고 영화형식의 경계와 장르의 결합. 기이하고 그로테스크 하며 출입문이 없는 방을 세트로 제작하였다. 그곳이 주인공 마크의 무의식의 공간이라며...무의식은 쌓이는 것이지 들어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등등을 말하며 설명했다. 누군가는 이것을 포스트모던함이라고 하는데 거기까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두서없이 나열했지만 난 그것을 다 모으면 뭔가가 나올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작업이 너무 즐거웠던 것은 내가 직관적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을 글로 쓰고 이미지화 시키고 장소를 찾고 배우를 찾고 하는...성립할 것인 가에 대한 물음을 증명하려는 노력에 있었다.... 지금까지 한말을 이해하겠는가? 그렇다. 이것은 그야말로 얼토 당토 않은 혼자만 하는 이기적인 실험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외국에서 실험영화를 전공하신 김모교수의 강의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매주 들고오는 파격적인 실험영화 작품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것이 영화란 말인가? 이런 영상이 영화의 범주안에 들어가는 것인가? 라는 충격에 휩쌓여있을 때였다. 그리고 뭔지모를 그 강한 실험성에 동조가 됐었다. 새로운 영화를 만들려면. 이제 더이상 이야기가 아니라 형식의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결합이야말로 새로운 시도가 될 것이며 특히 장르의 최전선에 있는 뮤지컬과의 결함은 더욱 충격이 클것이라는 게 치기어린 나의 판단이었다.

 부가적으로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 잘 아는 감독들의 목록도 첨가했다. 만약 브레송이 뮤지컬을 찍었었더라면 어떠한 영화가 나왔을까? 그래 놓고 배우를 불러 브레송이 쓴 씨네마토그래프의 단상에서 나오는 구절을 내 생각인 냥 읊으며 넌 모델이라며 기존에 했던 연기와는 다른 연기를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문어체 대사와 무표정함 잠에서 금방 깬 듯 느릿한 움직임이 만들어졌다. 물론 상당히 어설펐다. 배우란 존재는 감독이 영화에 대해 사유하는 깊이만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난 몰랐기 때문이고 배우 개인의 작업 즉 캐릭터화 하는 것 은 내가 기획한 영화에선 전혀 필요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씨네필 감독은 들어봤어도 씨네필 배우라고 하면 친숙한 단어는 아닐 것이다. 이렇듯 난 척하면 딱 나오는 게 연기인 줄 잘 못 알고 있었다.  난 이것을 한참 뒤에 몇 편을 더 찍으며 깨달았다. 사실 난 척하면 딱하는 영민한 감독은 아니었다. 경험하고 실수하고 부딪히고 깨져봐야 알게되는 소비적인 감독이었다.

이것 뿐아니라. 덧 붙여 이와이 슈운지가 문득 낮잠을 잘 때 꿈을 꾸면 이러할 것 같은 순간을 담아낸 것이라며...사구로 배우들을 끌고 가서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으며. 김기덕의 빈집에서 재희가 카메라 뒤로 사라지고 난 뒤에 이어지는 마법과도 같은 샷바이샷을 그대로 옮겨오고... (무엇보다 강력한 영향을 받았던) 레오 까락스의 나쁜피에서의 인물관계 질척거리는 시대의 기온에서 나오는 색감과 구조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사운드의 사용을.(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오우삼이 자신의 영화를 오마주한 것에 대한 오마주를 하며 스파이크존즈의 뮤직비디오의 뮤지컬 스타일 크리스 커닝햄의 초현실적 상황을 묘사한 뮤직비디오 등등...그리고 당시 실험영화 수업시간에 보았던 나를 개안케 해주었던 수많은 실험영화들을 다 끌어들였다... 그때는 이런 단어가 없었는데 요즘 만들어진 신생 단어로 설명하자면 장르 종결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서 내가 ‘같다‘라고 얘기한 것은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때의 내 자신이 상당히 어리고 아직 영화가 어떤 것인지 잘 몰랐고. 지금이라면 절대 시도하지 못했을 영화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07년의 나는 그때의 또 다른 ’나’일뿐이었다. 바로 이점이 정성일에게 하고 싶은 말 중 하나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자.....

 시간이 흐르고 이후 여러 작품을 찍으며 스스로 계속 변화하고 있음이 영화 결과를 보며 그 영화들을 본 사람들과 대화해 보며 자명하게 보였다. 내가 말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내 뉘양스와 표정과 내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한 관념적 사고를 곁들인 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자 알아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고 그 구축과정이 힘들면 영화에 대한 혹평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이전보다 미니멀해지고 주재도 명확해 지지만 여전히 내가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지점이 너무 높아 함부로 올라갈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보였다. 천천히 올라가면 언젠가는 끝이 보이겠지...라는 생각을 하기에 내 성격은 다분히 급했으며 정상에 오르면 있을 무언가를 빨리 알고 싶은 조급함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금방 체력이 바닥났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생각했다. 높은 벽이라는 생각이 들면 거긴 누군가가 넘어가겠지 라며 나의 길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길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정상을 목표로 삼지말고. 지금 나와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산의 맑은 공기와 흙을 조금씩 천천히 느끼자고...


 그러며....영화예술이란 것은 기필코 감독의 예술이며 기필코 공동의 예술이며 이것은 만드는 사람에 따라 정말 다른 영화가 나오는 구나...라며 겨우 주저앉고서야 그 조급함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나의 스타일과 영화관을 찾아나가기 시작했다...아직도 여물지는 못했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어쨌든 예술가는 실패하는 권리를 가져야만 좋은 예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전작을 스스로 실패했다고 판단했고 그만큼 그 어떤 작품들 보다 큰 교훈을 얻게 되었다. 잘 되었을 때 보다. 실패했을 때 나에게 더 이득이 되는 구나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난 그간의 전철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다. 영화를 하며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지만 잃은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영화는 보는 가운데 알게 되지만 정말 큰 깨달음은 영화를 만들면서 느끼는 것이다. 허문영은 정성일에게 물었다. 당신은 영화를 찍으며 영화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작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번 작업을 통해서는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정성일은 대답했다. 27살 때 부터 수많은 영화감독들을 인터뷰 하며..왕가위 허야오시엔 지아장커. 임권택 홍상수 김기덕 등등을 만나서 그들과 대화를 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현장에 찾아갔다. 취화선 197일간의 기간 중 90여일을 같이 있었다. 그래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직접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그리고 뒤 이어 현장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말 했지만 그게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스타일을 빌려 말하자면. 그는 아직 잘 모르고 그 대답을 피해간 것이며 영화를 만들었지만 무엇을 더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는 말로 들려왔다. 그는 대답대신 자기 현장에서의 이상한 풍경에 관해 스스로 질문해 왔다. 자신이 어떠한 장면을 찍으려고 하면 연출부 혹은 제작부에서 ‘감독님 이건 안 되는 겁니다.‘ 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다른 현장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이라는데.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정성일의 대답은 이랬다. 후에 후회하면서. 했던 말은 ’아니 왜 안 되지? 1955년 이탈리아에서 로셀리니가 이미 했던 것들인데.‘ 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가 평소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르다고 생각이 들면 소통하길 거부한다. 토론을 피한다. 물론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라곤 하지 않는다. 그는 교양이 있는 사람이니까.


 이때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배우들을 설득했을까? 현장에서 배우들을 어떻게 다루며 인물을 만들어 나갔을까. 난 한 블로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배우의 탈을 쓴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들(정성일)이 가득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배우들은 자신이 이 영화를 찍으면서 이해를 하고 연기를 했을까 싶다. 자신이 찍는 영화가 뭔지 알면서 했을까?..햄버거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망치를 사고. 자살을 하고. 춤추고. 도망가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이건 감정적인 문제다. 배우들은 감정을 컨트롤 하여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정성일이 주문한 연기 방식은 그 어떤 이유로도 납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걸작들의 사연을 돌아보면 배우들이 연기를 할 때 꼭 배역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어야 잘하는 것은 아니기도 하다. 감독을 믿고 시키는 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난 차라리 이런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신하균도 정유미도 모두가 대본의 대사를 외우고 대사의 필연적인 느낌을 채득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기계적으로 읊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스미스 요원들이. 완벽한 정성일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성일의 언변능력, 그의 문어체 구사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가 진심으로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하며 진심으로 영화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분신을 만들고자 했던 감독은 착각에 빠지고 만다. 아! 이 영화는 교양영화의 시초이고 문어체를 구사하게 되면 나의 그 뜨거운 감정을 대중들이 느꼈듯 관객들도 똑같이 느낄거야..배우들아 나처럼 말해봐 교양있게.....하지만 영화에선 실패하고 만다. 정성일의 그 강력하고 처절하고 영화의 순정으로 가득한 자신의 내면을 모든 배우들에게 투영하고 싶었겠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너무 독특한 사람이고 소통하기 힘든 인간이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은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라는 사실....심지어 난 정유미의 독백이 이어질 때 어느 순간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길어지자. 차라리 이것은 교양에 대한 비아냥거림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교양영화가 아니라 교양에 반하는 영화가 분명하며 스스로 교양인이랍시고 껄떡대는 인간들에게 네 자신을 알라며 경종을 울리는 영화. 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평소 과묵한 감독들은 현장에서도 말없이 배우들의 보면서 그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다혈질인 감독은 스텝을 폭행하면서 연출을 하기도 한다. 대인관계 능력이 탁월한 감독은 많은 말을 통해 배우들의 예민한 심리를 역으로 이용한다. 트러블을 싫어하는 감독은 칭찬 일색으로 분위기를 돋는다. 원하는 것은 하나. ‘영화를 잘 찍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있는 것이고 이 시도는 각자의 성격에 맞는 연출 방법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그가 많은 감독들을 만나 답을 구하려고 했지만 못 찾았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 스스로 찾는 것이지 누군가의 현장에서 남들이 연출하는 모습을 보고 배울 수는 없는 것이다. 홍상수는 그렇게 자신의 경험에 상상력을 보태어 영화로 표현할 뿐이며 박찬욱은 문학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문어체적 대사가 들리는 것이며. 봉준호는 만화적 상상력에 기대어 꼼꼼하게 영화를 찍어나갈 뿐이며. 김지운은 영화광으로서 장르에 능통할 뿐이다. 각자 자신이 살아온 삶의 괴적에 맞는 영화를 만들 뿐이다. 영화를 찍으면 그 영화를 찍은 감독이 어떠한 사람인지 충분하 가늠할 수 있다. 영화예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결국 대중의 심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정성일은 자신이 영화를 비평하듯 찍어 버렸다.



 난 정성일의 글을 거의 다 읽었고 그가 하는 강연에 정말 많이 가보았다...대부분 사람들 앞에 나와 그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본인도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의 화려한 화술에 넋을 잃고 만다. 그리고 방금 봤던 영화보다. 그의 말이 더 재미있게 느껴지고 그가 아니면 아닌거고 맞으면 맞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것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건 보고 또 봤다. 난 그를 통해 이 과정을 많이 겪었다. 그는 늘 자신이 사랑하는 수많은 영화감독의 이름과 보지도 듣지도 못한 수많은 영화의 제목과 그것의 구체적인 연도와 그냥 봐서는 도저히 알아내기 힘든 영화의 이드 그러니까 영화를 만든 감독의 심층심리까지 파헤치며 거기에 부가적으로 역사적 철학적 백그라운드와 문학과 미술 음악...그에 관계된 사람들의 인용문까지 열거하게 되면. 물론 교양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는 누구도 정의를 내릴 수 없지만 어림짐작. 요즘의 대학생 수준에서 절반정도는 그의 말을 100%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은 반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건 묘하게 모르면서 그 말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마법처럼..... (난 이것 때문에 따로 공부를 한 적도 있다.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그는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묘한 태도...아님말고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 영화를 아직도 보지 않았단 말야? 세상에! 난 그를 친구로 삼고 심지 않아’
 

그가 어떤 질문이 들어오면 믿음이 가득하고 확신에 찼을 땐 정언명령처럼 하는 말의 스타일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관객 : 감독님 감독님에게 있어 좋은 영화란 무엇입니까?
성일 : 두 번 보게 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늘 이런 식의 ‘A는 B다‘ 라고 정의를 내린다. 그리고 그 뒤에 왜 그렇게 생각하는 가에 대해 엄청난 주와 해석을 단다. 마치 책을 보고 읽듯이....(카페느와르의 인물들처럼....다른 의견이 파고 들 여지도 없다. 타인과의 대화 속에 그 여지가 없다. 완전한 소통의 단절. 힘들어하고 아파하고 싸우고 그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난 그것이 쇼처럼 보였다. 일종의 세상에 대한 엄살이랄까.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관한 글을 읽으며 공간이라는 말이 나오면 바로 덮어 버린다고 한다. 공간이 아니라 자신은 장소를 찍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글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이건 스스로 자신의 안에 갇히려는 어리석은 방법이다.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라면 난 장소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왜 공간이라고 썼는지에 대해 곰곰이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달리 보았을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감독은 큰 감독이 될 수 없고 역시 좋은 영화를 찍어낼 수도 없다. 감독은 영화를 만들며 만개 이상의 결단을 내리지만 무엇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들어줘야 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필연적이다.)....감독님은 위에서 한 말에 대해 주석을 붙인다. "여러분도 여러분 나름의 좋은 영화에 대한 기준을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때 대부분의 관객들은 머릿속으로 기준을 세우기보다. 아. 두 번 보는 영화가 좋은 영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혹은 그럴 수도 있구나. 라고...


카페느와르를 보았고 보면서. 5분 만에 처음 든 생각은. 철저히 마음대로 하고 싶은 데로 다 할 거구나...라는 것이었고 예상은 적중했다. 정말 하고 싶은 걸 다 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가 늘 말하던 ‘전 이보다 아름다운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운’ 와도 같은. 수식어가 붙을 만한 단 하나의 샷도 찾아 낼 수 없었다. 그가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말했던 샷의 나눔에 대한 철학정도는 느낄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씬과 씬의 어정쩡한 배열과. 각개의 어우러지지 않는 샷의 나열이 서로 영향을 주지 못하고 떠돌자 영화는 자신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고 관객은 방황하게 된다. 자신이 직접 뱉어낸 말을 주어 담을 수 있을까?

영화는 세상이지만 쇼트는 그자체로 우주다. 그래서 쇼트는 항상 영화보다 크다는 생각을 한다. 왜? 영화는 세상을 쫓지만 쇼트는 잡는 순간 완결된 우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쇼트를 쪼개는 건 우주를 자를 것인가 말것인가를 질문하는 거다.


씬을 숏으로 자른다는 것은 영화가 자기 안에서 하나의 우주를 구성하고 하나의 시간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한다. 어떻게 자르고 잇느냐에 따라 이야기, 감정, 분위기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다르게 구성된다. 영화의 쇼트는 세계의 마디인 셈이다. 정성일의 이 씬-쇼트에 대한 관점은 그가 영화를 분석하는 가장 중심적인 방법론이기도 한데 난 이것에 어느 정도 동의 하기도 하며 실제 영화를 만들때 상당부분 참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이 직접 영화를 만들때는 얘기가 달라졌다. 이때 그 쇼트 안에 배우들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을 해보자. 그리고 위에서 내가 말한 배우들의 어색한 몸짓이 더해진다고 가정하자. 쇼트가 엉성해도 그것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배우일 때가 있다. 관객은 결국 배우에게 감정을 이입하니까. 하지만 배우가 그 혼돈의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순간 길을 잃어버린 양처럼 겁을 먹는 것을 우린 두눈 뜨고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배우들은 한없이 나약해 보인다. 경직되어있다. 몽유병 환자처럼 꿈꾸듯 말한다. 이건 마치 처음 영화를 만드는 영화과 학생의 작품에 처음 연기하는 배우들이 나와 카메라 앞에서 얼어버린 것 처럼 말이다. (또한 이 영화엔 불필요한 인서트로 넘쳐난다.) 그가 한가지 잊은 건 그 우주 안에 누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그는 단지 그림을 나누고 붙이는데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영화비평은 대게 미학에 대한 관심과 감독의 세계관을 다루며 배우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정성일의 평이 대부분 그러하여 전적으로 감독에 대한 지지로만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자신이 영화를 만들때에 조차 중요한 것을 놓쳐 실패하는 수순을 밟게 된것이다.



그가 영화를 찍기 시작했을 때 많은 지면을 통해 밝혔다. 이 영화는 죽도록 치열하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라고. 그 치열한 감정이 있었다면 (도대체 어디에?) 감독의 큰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그 감정이 스크린에 조금이라도 느껴졌다면. 절반은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연기좀 하는 배우들을 끌어다 놓고서도 그것을 해내지 못한걸 보면 결국 양쪽 다 실패한 듯 보인다. 그 어떤 대사도 마음속에 들어와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하여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라가 버리고. 연극을 하는 건지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톤과 표정은 감정을 괴리시킨다. 단 우린 그것을 머리로 읽어 낼 수는 있다. 그들이 입으로 밷어 내는 말은 감정을 뱉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입으로 옮겨가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정성일은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이 드디어 머리를 써가며 영화를 보길 원하는 단계까지 영화를 끌어 내려 버린다. 이러할 것이었다면 소설을 쓰지 영화를 왜 찍었던 것일까? 그가 만들어 내었던 동시대의 텍스트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다가올 미래..지금의 현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는 또 아닌 듯 하다. 광우병은 대부분 사기로 들어났고. 국민들은 시대의 광기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이명박은 아직도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으며 노무현은 자살을 했다. 그리고 박근혜는 다음 대선 행보에 열을 올린다.

그는 또 말했다 영화가 정치적으로 되는 순간 영화는 시시해져 버린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말했던 금기를 어기며 첫 장면부터 정치적인 의도를심어내었다. 두명의 대통령이 죽었다. 죽은자들의 도시. 하늘을 올라가는 것은 빨간풍선. 그 뒤로 보이는 남산. 그곳의 정치적 시선. 사랑을 이야기 할 것이라면서 개인의 정치적인 입장을 스크린에 투영시키고자 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프로파간다가 되길 자청한 것일까? 그가 늘 인용하는 말."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다루는 것은 파시즘이고 미학적인 것을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본주의라는 것." 거기서 예술이 해야 되는 역할이 중재라고 했다...과연 자신은 예술가 스스로 자신이 말한 중재라는 입장에 서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물론 예술가가 그 중재를 의식하며 예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 하며 옳은 것도 아니다. 그가 한 연출은 스스로를 정치와 미학이라는 비평의 대목에 끼어있고 싶은 충돌을 표현한것은 아닐까? 도대체 어떻게 예술에서 미학적인 것을 때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술 자체가 바로 아름다움인 터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난 그가 예술을 했다고 인정하기 힘들다. 난 그의 영화를 봤고 평가를 내리는 순간. 그 어떠한 쇼트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성일이 영화로 정치를 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영화를 만든 것이다라고 물어본다면 딱히 말하기도 힘들다. 그런 시선만으로 가득하다. 단 한가지 좋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술은 중재의 역할이라고 할 때에 대중에게 환기의 작용을 한다면 어느정도 성공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의 코드를 화면 곳곳에 넣는 순간. 삶은 사라져 버리고 장소만 남게된다. 코드가 들어나는 순간 그것은 코드 자체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시해 져 버린다.

난 영화는 삶의 기록이라고 철저히 믿는다. 왜 이렇게 길게 찍었습니까 에 대한 대답으로 그가 말한 '시간의 예술'도 동의하지만 그것은 평론가의 입장에서 할말이고 감독의 입장이라면 '시간의 체집'이 더 옳은 말이다. 그 둘은 완전 다른 말이다. 정성일은 평론가의 색을 버리지 못한 체 그저 아카데믹하게 시간을 찍었다. 하지만 감독은 세상과 그에 속한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을 체집해오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체집해오는 것이다. 그게 영화라고 생각하고 관객은 정리된 시간속에 감독을 느낀다. 정성일의 영화에는 삶이 사라지고 공간(장소)의 어두움만이 남아있었다....정성일은 영화를 하기엔 비평적 재능이 너무 뛰어났고 연출을 하기엔 스스로를 재단 혹은 정재할 장애물으 많았던 탓이다. 자신이 상대방의 영화를 비평하며 영화의 기준을 세우고 좋은영화와 나쁜 영화의 호불호가 명확한 그에게 자신이 만들어낼 영화는...적어도 그 어떤 영화들 보다 윤리적일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 스스로 자폭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정성일은 타이틀을 가운데 넣고. 세계소년소녀 교양문학전집으로 가면을 씌운다.   



 쳇바퀴 돌 듯 청계천을 미치도록.(미치지 않고서야 종로에 그 많은 길을 두고 거길 걸을 이유가 있겠는가?) 걸어다니는 초현실적인 장면 연출로 현실 정치를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는지. 이명박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고문은 어떤 의도인지. 그것이 대한민국의 서울 시민들에게만 통용될 수도 있을 코드라는 사실이...그것에 교양의 탈을 써버리려는 이중성...그래놓고 자신은 켄로치의 영화를 시시하다고 그런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것이 납득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도대체 그와 켄로치가 그럼 다른 지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전면적인 것과 은연중인 것의차이? 나는 그가 만들었던 세상의 절대다수인 노동자들과 소외계층을 위한 현실 영화 따위는 아주 시시하니. 이것은 무릇 교양있는 지식인들을 위한 영화요 모르면 자신의 무지를 탓하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이 순간 교양(敎養)은 교양(驕揚)이 되어 버린다... 일관성 없는 (사실 두 개의 소설을 붙인다는 것 차체부터 오류다.) 두개의 고전을 각색하려는 도전 자체는 크게 받아 들이고 싶다. 아무도 하지 않은 어떤 행위에 대한 시도가 좋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가 사랑하며 늘 인용해 마지 않는 트뤼포가 히치콕과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한다.

 

트뤼포는 히치콕과의 대화에서 "당신이 만들어온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대중 소설이거나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오락물입니다. 쉽게 말하는 문학속의 걸작은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몇몇 히치콕의 지지자들은 그가 죄와 벌을 영화화 시켰으면 한다는 말을 던진다.

 

히치콕이 대답하길

 

그런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벌>은 다른 사람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감독들이 문학의 걸작들을 왜곡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나는 그런 일에 기꺼이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중략) 훌륭한 소설 한 편을 쓰려면 3년 내지 4년이 걸립니다. 그 소설은 그의 삶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그것을 완전히 물려 받습니다. 스태프와 기술자들이 어영부영 하며 그 작품을 만지작 거리고 나중에는 아카데미상 후보작으로 지명되기도 합니다. 그러는 동안 작가는 완전히 잊혀집니다. 나는 그러한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얼마나 윤리적인 창작자의 모습인가. 우리가 흔히 영화예술에 대해 비꼬듯 타 예술을 괴물처럼 흡입해버리는 최종의 종합예술이라 말하곤 하지만 영화감독이 동일한 창작자로서 다른 분야의 작품에 대해 존중하는 이 태도는 정말 본받아야할 것이다. 이것이 50편이 넘는 영화를 찍은 감독이 한 말이다. 정성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둘은 좀더 세부적인 이야기를 나눈다. 트뤼포는 히치콕이<죄와 벌>을 절대 영화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받아들인다고 말하자. 히치콕 역시 그 말에 동조한다. 그리고 완벽하게 방점을 찍어 버린다.

 

히치콕 : 내가 영화로 만든다 해도 아마 원작처럼 훌륭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에는 수많은 단어들이 있는데, 이 모든 단어가 그 자체로 기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트뤼포 : 맞는 말입니다. 이론적으로 걸작은 이미 그 형식에서 완벽함을 결적적 형식을 발견한 작품입니다.

히치콕 : 바로 그렇습니다. 글로 쓰여진 단어를 카메라의 언어로 대체해서 그것을 영화적 표현으로 제대로 전달하려면 6~10시간 짜리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영화는 좋을 수 없습니다.

 

그가 하려고 했던 고전에 대한 도전. 이후에 이어지는 <보바리 부인>의 영화화를 진행하고 있는 그는 어찌보면 당대의 작가. 히치콕과 트뤼포가 성취하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 도전을 하려는 생각이었을까? 늘 트뤼포의 비평적 취향은 인정하면서 정작 트뤼포가 가진 창작자로서의 결단에 대해선 다른 입장을 취하려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친구는 그의 영화를 보며 브래송의 시네마토그래프가 현대적으로 재탄생 했다고도 말하지만 웃기는 말이다. 브레송은 어째됐던 그의 뿌리를 히치콕에게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는 말했다. 현대 영화에서 장르느아루와 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감독이 있다면 그는 바로 히치콕이라고. 도대체 그가 죽기전까지 계속적으로 고전 소설을 영화하면서 성취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고전을 택함에 있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오랬동안 대중에게 사랑받아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말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렇게 대중을 얘기 하면서 도대체 영화의 형식과 표현에 있어서는 왜 대중적 방법을 취하지 않았던 것일까. 혹시 그러한 방식으로 표현을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은 작품을 선택했던 것일까? 정성일은 교양을 대중과 혼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교양은 절대 대중적이 될 수 없다. 교양은 선택적이며 계급적인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절대 대수의 사람들을 말한다. 자신이 만든 영화는 교양영화라며 이야기는 가장 대중적으로 오랬동안 사랑받아온 이야기를 골랐다니.... 그는 영화라는 매체를 너무 과대 평가 한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자기 밥줄이고 자기 일인데 자존감을 높이려면 어쩔 수 없지....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수 밖에...영화가 하찮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문득 생각이 든다. 우리가 늘 하는 말... “케익맛을 볼 줄 안다고 케이크를 잘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성일은 케익 맛에 대해선 기가 막히게 잘 표현하고 다양한 케익을 먹어보았으며 우리에게 각국의 다양한 케익을 선물해 주어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정작 자신이 만든 케익은 볼품이 없었다....집에 들고 가서 혼자 드시길 권한다.

다시 4년전으로 돌가면. 그때 난 대화라는 걸 몰랐다. 물론 영화로 관객과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관객을 탓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유독 흥행못하는 유럽영화들을 보며. 아니아니..유럽까지 갈 필요도 없다. 김기덕의 영화를 폄하하는 대중들을 혐호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말이지...하지만 이것이 대화의 매체라면 우린 대상을 알아야 한다. 이건 회화가 아니다. 미술이 아니다. 단지 아주 작게 그것을 끌어 안을 뿐 이것은 돈을 내고 극장에 앉아서 봐야하는 시간예술이라는 사실이다. 감독에겐 그 시간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난 어린 내 조카와 이야기 할때.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앞에서 내가 어리광을 피우며 까꿍까꿍한다. 조카 앞에서 대통령을 욕하진 않는다. 심형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어왔고 그것이 지금의 라스트 갓파더 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영화 물론 유치하다. 못봐주겠다. 하지만 적어도 선이 이긴다는 일관성과 더불어 아이들과는 소통하고 있었다. 현대의 아이도 마찬가지고 과거 내가 아이였을 때도 마찬가지고 .... 그가 심형래보다 나은점이 뭔가? 문득 궁금해 진다. 정성일 감독님은 어떤 대상이 있는지..다행이 허문영이 그 질문을 던졌다.

허문영 : 감독님은 영화에 대한 글을 쓸때 그 영화를 찍은 감독을 유일한 독자로 생각하고 쓴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는 누구를 대상으로 만드신 겁니까?
정성일 : 저와 영화의 피를 나눌 수 있는 형제들입니다. 


  
그는 피를 나눌 수 있는 형제들을 찾았다. 만약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그게 바로 나요!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순간. 난 그의 형제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이제 난 당신의 글을 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애증이 있는 이 위대한 영화 평론가에게 어리디 어린 영화라곤 당신의 손톱끝에 달린 먼지보다도 부족한... 내가 감히 말하고 싶다.....영화 역사를 둘러보면 그 당시의 영화들은 동일한 맥락이 있다. 초기의 영화들 부터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인상주의 시적 리얼리즘과 누벨바그의 영화들과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들 영국의 다큐멘터리즘 아시아 각국의 영화들과 그리고 자생하는 미국의 영화들이 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는 역사와 사회의 시스템과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해속에서 받아 들여진다. 정성일도 그점은 인지할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뒤... 10년 20년이 지나 역사 속에서 그의 영화가 어떻게 재평가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시에는 천대 받았던 고다르의 초기 작들이 현대에 와선 그 가치를 발휘하 듯 정성일 그의 영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선 간단하다. 바로 그의 다음 작품들이 결정지을 것이다.

결국 그가 살아남으려면 영화를 계속 찍어야 한다.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이 세계에 들어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싶다.

작가 정성일 

입봉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