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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녹터널 애니멀스> 형식만 남은 공허한 울림



신선한 형식미임은 분명하다. 이야기도 쉽다. 하지만 주인공의 깊은 내면으로 함께 들어가기엔 중요한 뭔가가 빠져있다.

이것은 아마도 에이미 아담스의 근원적 욕망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에이미 스스로 언급한 잔인한 이별이라는게 알고보니 평범한 남녀의 이별로 묘사되고

새로운 남자에게 가는 이유가 단순히 그냥 좋은 어떤 매력 때문이라는 것들 말이다.

그 이유가 설득이 안되는데 에이미한테 감정적 이입이 되고 그녀가 놀라며 소설을 읽는게 동의 가 될까?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또한 에이미가 느끼는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그 소설의 첫 독자가 되어 달라며 보낸 제이크의 소설은

명백히 복수이며 영화의 주된 사건이자 발단인데 그 결과가

둘사이의 소소한 연애사 속에서 드러난 에이미의 죄의식이란 감정에서 그쳐 버린다. 사실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나오길 기대 했다. 그 다음이 있어야 본론이 되고 그것이 메시지가 될테니까.


또한 소설이 적절한 복수가 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

필자 역시 글을 쓸때 싫어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쓰다가가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해서 굴욕을 맛보게 하거나 여러가지 방식으로 요리를 한다.

결국 작가의 사적인 경험안에서 느껴진 것들을 통해 나오는 것이 글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속의 제이크의 행동들이 과연 복수를 할 만큼의 스토리 였는가?

에이미 아담스는 어쩌면 너무 필요이상으로 감정이입을 해서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정말 고통스럽게 느끼게 한다면 에이미 아담스가 주인공이 되어 그 격정적 감정을 고스란히 안게 해야 하는것 아닐까?

제이크가 죽은 딸과 부인을 위해 복수를 하는 내용 안에서 에이미는 왜 고통을 느끼며 글을 읽어야 했나...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면 미 서부 사막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들은 존포드에서 시작되는 유구한 계보가 있고

정말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며 상당한 걸작들도 많고 이보다 더 폭력적이기 까지 하다.

미국적인 공간 그 영화적 공간을 나 역시 사랑한다.

감독이 왜 소설의 배경을 서부 텍사스로 삼았는지도 감이 온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녹터널 애니멀스> 라는 소설의 내용이 영화적 장르 안에서 즐기는 스토리가 되어 버린다.

그 플롯 하나만 때어 놓고 봐도 즐길 수 있는 스토리인데

그것을 주인공이 소설로 접하게 되면 형식적으로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냐는 것이다.

그런 영화적 장르의 재미를 주고 있는데 정작 에이미 아담스는 읽으면서 힘들어 한다.

때문에 이때 주인공과의 감정적 괴리감이 무척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는것이다.


"재밋구만 왜 힘들어 하니?"





그래서 인지 극중 에이미 역시 이런걸 가지고 복수라고 하기엔 ...

어디가서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부분이라

같이 식사나 하자고 메일을 보냈을 수도 있다.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게지...미안하기도 하고.

이건 감독 본인도 화자의 감상에 대한 과대 해석일 수도 있음을 알았을 대목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감독의 불친절함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제이크가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은것마저 해석의 범위가 광범위해지고 말았다.

이 말은 곧 작가가 하고 싶은 얘기가 상당히 모호하다하는 뜻이기도 하다.

난 이런 식의 하다만 스토리는 무척 안좋아한다.


그럼에도 각본의 허술함을 뒤로 하더라도

에미이 아담스, 제이크 질렌할, 마리클 섀넌의 연기는 능수 능란하다.

특히나 작품 선구안이 좋은 이들 세 배우의 선택이기에

그들의 선택을 지지하는 뜻에서라도 조금더 열어두고 봐주고 싶었으나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던건...

감히 나의 전공인 액자식 구성을 이렇게 허술하고 밋밋하게 그렸다는데서

안도와 분노가 동시에 나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