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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셰임> 고독한 섹스 중독자의 방황기

1. 배우로서의 영화.


훌륭한 연기를 해내는 배우를 보면 일종의 행위예술가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어쩜 저런 연기를 해내는지 도저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물론 모든 훌륭한 연기의 뒤엔 캐릭터를 만들어낸 작가와 그렇게 보이게끔 촬영을 진행한 감독이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어쨌던 난 스크린에서 배우의 얼굴을 보고 생각한다. 바로 그가 저기 있다고. 


배우로서의 패스빈더가 아닌 마이클이 저기 서서 걸어간다고 말이다. 쉼없이 음란한 상상을 하며 어디서든 자위행위로 욕구를 해소하는 고독한 한 남자가 있다. 틈만나면 야동을 보고 시간이 되면 집에 창녀를 불러들인다. 공공장소에서도 여자를 보고 섹스하는 상상을 하며 결국 그여자를 취한다. 맥퀸은 추측컨데. 지금 시대의 징후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2. 시대의 징후


세상은 점점 음란해져가고 있으며 성적으로 타락해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문을 봐도 성폭행 성추행에 관련된 사건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누군들 들먹이지 않다 하더라고. 유명했던 연애인의 미성년자 성추행과 청와대 대변인의 그것 말이다. 성에 관한 사건들은 대부분 남자와 여자가 있음으로 발생되는 범죄다. 성과 성의 대립에 대해 혹자는 말한다. 사회에서 더이상 남자가 설자리를 잃어감에 따라 남성성으로 여성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강해진다고 말이다. 남자는 나약해지고 있다. 여전히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실제로 현대의 남성들의 정신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통계가 있다. 여자는 모성으로서의 본능이 있지만 남자에게 해당되는 부성은 본능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일 뿐이다. 이러한 부성의 책임감은 삶을 피로하게 만든다. 스스로 노력하여 끝내는 쟁취해야만 하는 남성의 공격적 사회활동에 여자는 대부분 안전지대에 놓여있었다. 그 지대에서 차별을 받으며 곧 울타리를 벗어나 남성과 대등해질 순서를 느긋하게 기다린 것이다. 남성은 불안해 진다. 남성성끼리의 경쟁도 치열한 가운데 여성성이 침투함으로 자신이 설 자릴 잃어간다. 결국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남성의 지휘는 박탈당하고 만다. 전쟁을 주도하고 삶 속에서 늘 희생의 역사를 써내려간 남성들은 여전히 여자 손목을 잡고 길을 걸어도 눈은 다른 여자에게 향하며 쟁취하고 싶은 모성성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회의 변화로 인해 여성성에 의지하고 싶은 욕구의 끝없는 굴래에 갇혀있는 것이다. 이 대목을 맥퀸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보여준다. 과거에 잠시 스쳤던 여인을 다시 만남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게 아닌 응시함으로 취하고 동시에 의지하고 싶은 현대의 일회성 사랑이 발동하는 것이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함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섹스를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온전한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는 왜 그래야만 했을까? 





3.  섹스중독.


인간의 섹스는 번식욕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맏는 과정을 통해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섹스는 조금더 고차원 적이다. 그것은 쾌락 자체다. 성적인 억압은 늘 사회에서 인간들에게 이성으로서 절제하게 만든다. 이 억압기제는 실제 섹스로 치환되지 못할 경우. 타인의 섹스를 관람함으로 대리 만족을 느끼게 된다. 인간들에게 만연한 상상력이 주는 실제적 판타지를 야한 동영상을 통해 해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제화 하기 위해 남성은 자위행위를 한다.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판타지에 빠지듯 잠시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영화는 다양한 세상이 있고 긴 시간의 이야기를 들어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감정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섹스영상은 조금 다르다 이것은 결국 남성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최종 목적인 사정에 다다르게 되야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다. 바로 이점이 핵심이다. 섹스는 몸의 흥분을 통해 분비물을 배출하는 쾌락의 단계이다. 이것은 스스로 강제하지 않으면 정절에 다다를 수 없다. 즉 섹스의 도구인 성기를 누군가 나서서 자극해 주거나 스스로 하지 않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정의 결과는 무척 명확하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듯이 성욕도 같은 이치에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절제의 미덕 음식도 폭식을 하거나 단것을 많이 먹게 되면 정상적인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섹스가 동반되지 않고 무분별하고 장소 불문 대상 불문의 섹스를 하게되면 타인을 대할때 늘 성적인 기제가 작용함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여자만 보면 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어젯밤에 감상했던 야동에서의 장면들이 떠오른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사람에게 일상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될것이라 보는가? 불가능 하다. 누군가는 야동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라고 하는데 그런식의 긍정적인 해석이 주를 이루게 되면 물론 죄착감을 크게 갖을 필요도 없지만 늘 이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4. 대상의 도구화.


부정을 특히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인간의 섹스가 동물의 교미와 다른 점은 혼자 느낄 수 있다는 것과. (대상이 없어도 우린 대상을 상상이라도 하면서 행위를 한다.) 번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난 그것에 근본적으로 욕구를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즉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만지고 싶고 하고 싶고 느끼고 싶은 것이고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다. 둘이 하나가 되었을 때 오는 만족감. 하지만 사정을 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은 다시 섹스를 찾게 만든다.


이것은 바꿔 말해 결국 고독이다. 현대인의 지독할 정도로 고독한 자화상을 셰임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누구나 상상을 하고 남자라면 누구나 여자와의 환상적인 섹스를 꿈꾼다. 길에서 섹시한 여자를 보면 한번이라도 더 바라본다. 아름다움에의 이끌림 인간의 욕구 등 많은 말들로 포장하겠지만 결국 고독이 문제의 근원이다. 이 점에 대해 포르노그라피 출판업계에 종사하는 누군가는 사람들은 왜 포르노를 보는가 질문하자 이렇게 말했다.  


외롭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포르노를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버리면 외로움을 기계적으로 희석시키려는 운동이 되고 각자의 눈에 든 대상은 외로움을 없애기 위한 도구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의 도구화는 도구를 다루는 파토스의 주체가 되지만 결국 역설적이게도 타자와 주체의 근원이 인간으로 동일하기에 도구화를 들이미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 물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점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다.





5. 예술영화의 지향점


요 몇 십년간 감상한 영화들을 통틀어 제대로된 예술영화 한편을 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셰임이란 영화는 예술영화로서 어떤 지점에 우뚝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세상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역할을 잘 수행했다. 진실이라하면 거짓의 반댓말이거나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감정. 우리가 잊으려고 하고 타인에게 상처가 안되기에 면죄부가 주어진다 착각하며 혹은 잊을 수 있다는 망강의 허울을 쓰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자신에게 죄가 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묵비권을 행사하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맥퀸은 셰임의 마이클을 빌려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대로 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셰임은 우리를 잠시 머물게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바라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