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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가면의 고백 - 20세기 일본문학의 시작.



 1.
 소설은 영화와는 달리 장면 연출을 독자 스스로 해야한다.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에 관한 호흡은 소설가가 아무리 단문으로 썼다해도 관객의 읽는 호흡에 때라 느낌은 달라진다. 영화를 생각해보자. 한 영화를 한달에 걸쳐 보았다는 것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바빴거나. 아니면 영화가 무척이나 지루했거나. 영화는 정해진 시간에 그 관람을 정확히 마쳐야 한다. 왜냐면 감독은 그렇게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고 이미 봐버린 이미지는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는게 아니라 정서와 느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영화의 내용을 온전히 친구에게 전달할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극장에선 자막이 올라가야 불을 켜준다. 시간의 예술. 시간을 담아내는 것이 영화라면 관객은 감독이 체집한 시간을 온전히 그 자리에 앉아서 느껴야 한다. 영화에서의 샷이 문학에서 문장이 된다면 정제된 이미지의 결합도 중요하지만 그 지속성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샷의 길이가 얼마나 길어지냐에 따라 감독이 하고자하는 말이 달라지는 셈. 관객이 1초면 읽을 문장을 5분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이 감독이다. 즉 지속성에 대한 주체가 영화는 감독이 쥐고 있다면 문학은 독자가 쥐고 있는 것이다. 

2.
난 가면의 고백을 읽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물론 하루종일 책을 읽는데 쏟아 부운 것은 아니다. 원체 난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린편인데다 이 소설은 문장이 워낙 화려해서 읽도 또 읽고 반복하다보니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대중들이 사랑하는 소설들 중 특히 하루키의 소설들을 보자. 문장이 대부분 1.2형식으로 연결되 있다. 그리고 사물과 인물의 행동 묘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미지화 하기가 편하다. 때문에 빨리 읽는다. 하지만 어려운 책이란 자고로 인물의 심리를 문장으로 묘사하는 책일터. 미시마 유키오가 묘사한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을 철저히 파해치다 거의 착란의 상태까지 다다른다. 소설속의 주인공을 작가는 그자신과 동일한 지점으로 끌고 가는데. 실제로 미시마의 어렸을 적 가정환경과 소설속의 인물 주변의 환경은 유사한 점이 많다. 강압적인 부모와 조모 밑에서 자랐다는 점이 그것이고 이러한 점들이 (결정적인 것은 그 어디에도 없으나) 주인공을 동성애자로 만들어 버리는데 한 몫한다. 미시마가 소설속에 만들어낸 자신의 분신은  실재감이 있는 자아의 발견 혹은 자기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인다. 과연 그는 가면의 고백과도 같은 입장이었을까?. 어쨋건 가면의 고백에 나오는 문장은 너무 길어서 숨을 헐떡이게 만는다. 

3.
몇가지 추억이 떠오른다.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와 성적 취향이 다를 뿐 동일한 인간임이 분명다. 라고 생각했던 과거와는 달리 난 동성애자들을 (치료가 무척 필요한) 정신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권보호는 이루어져 하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과연 난 결백(?)한가? 라는 질문에 가면의 고백 못지 않은 고백을 본인도 가지고 있다. 물론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중학교 시절 2학년 때 그 친구는 무척 살집이 두터웠다. 공부도 꽤 잘 했고 하는 행동이나 목소리톤이 상당히 여성스러웠다. 난 이상하게 그 친구에게 호감이 갔고 친하게 지냈으며, 어느날. 서로의 그곳을 만져주는 행동을 일삼았다 분명 장난이었다. 남자들끼리는 장난으로 성기를 만지작 거리는 일이 흔했다. 십대시절 그때의 그곳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신비로운 곳이기도 했다,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상태가 되니까 말이다. 장난으로 한두번 만지던 행위가 그 시간이 늘어났다. 상당히 길게 그리고 서로가 교환을 했다,. 내가 만졌으니 이제 니가 내것을 만져달라는 식이다. 우린 몇일 동안 그것을 즐겼다. 때론 몇명을 더 끼워서 놀기도 했다. 물론 모든 행위는 점심시간 교실에서 이루어졌고 공개적이 었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말 남성적인 아이들은 밖에서 공을 차고 뛰어놀았다. 말이 없고 조용하고 그런 친구들만 교실에 남아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난 이 기억을 잊지 못한다.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자신의 그곳을 맡기는 첫 행위. 

4. 
시간이 한참지나 여자를 만나고 20대 중반에 다다랐을 때. 난 또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난 양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고민에 난 부끄럽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그리고 모두가 다 하는 고민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몇몇 학교 후배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며칠 뒤 "00선배는 동성애자다" 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난 그 소문을 뿌리까지 찾아 어렵게 막아내었다. 근원은 역시나 몇몇 후배들이 다른 동료들과의 대화중에 오해가 있어 생겨난 소문이었다. 물론 대부분 농담이라,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몇년 뒤. 여자친구에게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난 남자랑 관계를 맺는 상상을 하면 구역질이 났는데 언제서 부턴가 그런 상상을 해도 받아들이게 됐다고. 난 여자친구를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날 괴물 취급하듯이 대했다.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이었는데 테이블에 앉아서도 그녀는 내가 잠시 던진 말에 대해 곱씹으며 재차 확인을 했다. 오빠 동성애자냐고....물론 난 아니다. 난 정상적인 이성애자다 난 오래전 상상에 대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크로 샐러드를 휘저으며 그 사실에 대해 조금 불쾨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2달뒤 그녀와 헤어졌다. 물론 헤어진 이유가 그것에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시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것이었다.

"그러한 인공적인 노력은 어딘가 이상하게 마비되는 듯한 피로감을 마음에 드리웠다.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 부자연스러움을 마음의 참된 부분이 눈치채고 악의 넘치는 피곤함으로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 정신의 피로감에는 무서운 독이 있는 듯했다. 마음의 인공적인 노력 틈틈이 때때로 몸이 자지러지는 듯한 자각, 속을 뻔히 다 안다는 의식이 나를 덮쳤고, 그 의식에서 도망치기 위해 나는 다시 뻔뻔스럽게 다른 공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금세 생생하게 나 자신이 되고 묘한 이미지를 향해 타올랐다. 게다가 이 함정은 추상화되어 마음에 앙금을 남기고, 마치 이 정열이 그녀를 위한 것이기라도 하다는 듯 나중에 억지 해설을 붙였다. - 그리고 또다시 나는 나를 속이는 것이었다. " <가면의 고백> 115p

물론 조금은 다르다, 미시마와 같이 동성애에 대한 관심을 의식적으로 져버리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내적 갈등이 아니라. 난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자기기만이었다. 그녀와 사귀기로 한 뒤 적확히 3일뒤 난 내 선택이 옳지 않았음을 알게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와의 전화통화를 옆에서 듣게 되면서 알게된 것이다. 폐륜이라는 단어에 근접한 언행이 날 놀라게 했다. 그리고 난 단지 그녀와 살을 섞는다는 의미 말고는 그 어떤 감정적인 공유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의 직감은 뛰어났다. 다행히 그녀는 나를 알아차린 것이다.

5.
내가 한 생각들이 위험한 상상일까? 상상에 대해 타인에게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은 표현이고 들어줄 대상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반응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단순한 자기고백이라면 일기장에 늘어놓거나 고해성사를 하며 신부에게 말을 하는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 한편으로 미시마 처럼 문학적인 테두리 안에서 언급을 한다면 괜찮아 지는 것일까? 그의 언급이(시대를 생각한다며)상당히 파급이 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시마는 매우 남성적이고 골수우익으로 유명했다. 난 이사실을 소설을 읽은 뒤 알게됐다. 그리고 놀랐다. 왜냐면 가면의 고백의 배경이 되는 때는 전쟁중였고 주인공은 전쟁에 대히 우호적인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이 국가를 위한다거나 일본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진짜 폐병이 아닌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심장병인 척하며 지냈다. 
훈장이거나 질병이거나, 둘 중 하나가 반드시 필요한 시대였다." <가면의 고백>161p

 징집되기 싫은 주인공의 독백이다. 난 이 문장을 읽으며 키득거렸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에 대한 생각은 다를바가 없는 인간의 본능아닐까 하고 말이다. 때문에 작가의 시선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니 당연하게 생각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편협한 시각으로 시대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정도라면 아직 올바른 세계관을 가진 살아있는 일본인들이 다수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앞섰다. 미시마는 왜 그랬을까? 왜 우익의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을까. 왜 진골 우익을 자처하며 60년대 극우파를 다시금 살려내었을까. 맨 위의 사진은 도쿄대 전공투와 일대 천으로 맞짱을 뜨고 있는 유명한 사진이다. 골수우익인 미시마와 전투적 좌파 도교대 학생들의 대결이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근대와 전통적인 것에 대한 충돌, 그로인한 혼란이 개인의 내면으로 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된다. 이때 떠오르는 다른 이름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와 오사무는 시대가 낳은 불운한 천재는 아니었을까. 30대 갑자기 헬스를 시작하며 남성미를 강조해왔고 자신의 스승과 연인사이로 지내며. 그렇게 체내화된 남성적인 것과 비 남성적인 것에 대한 관심의 충돌의 그 간극이 너무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작가의 모순되는 태도는 오히려 스스로를 소설속의 인물과 동일하게 현실화 시키고 있다. 마치 <가면의 고백>속의 자아분열적인 캐릭터처럼 미시마 자신의 모습은 현실 속에서 작가적 문학에 대한 태도와 인간 미시마로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필자가 보건데 그는 문학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건 아닐까 생각한다.